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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재 Jan 26. 2022

파리와 지랄 발광

파리, 텍사스


태풍이 불던 1987년 어느 여름날 극장에서 본 영화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우리나라에 큰 피해를 입혔던 태풍 셀마가 이미 휩쓸고 간 뒤였기에 태풍에 대한 공포가 최상에 달했던 시기다. 다시 새로운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하여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므로 가능한 일찍 귀가하도록 방송에서 권고했던 날이었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고, 80년대 세기의 연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던 나스타샤 킨스키가 여자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여서 꼭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세기의 연인을 알현하는 일을 놓쳐서야 되겠는가. 하필 태풍이 불던 그날이 마지막 상영일이어서 그날을 놓치면 다시 보기가 어려웠다. 요즘처럼 넷플릭스나 VOD 서비스 이런 것을 상상하지도 못하던 시절이다.


영화 Paris, Texas, 1984


태풍 속에서


우산이 몇 번 뒤집혀 가며 휘감아 몰아치는 세찬 비바람을 뚫고 극장으로 갔다. 극장이 문을 닫은 것은 아닌지 반신반의하면서 도착한 것이 마지막 상영 시간 10분 전이었다. 다행히 표를 사서 입장을 하니 간혹 국경일 행사도 진행했던 2층으로 된 낡고 큰 극장 안에 딸랑 두 커플이 양끝 뒤쪽에 앉아 있었다. 선배와 나는 두 개의 복도로 나뉜 아래층 중앙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물이 흥건했던 운동화를 벗어서 옆 좌석 팔걸이에 걸어 두었고, 잠시 후에 조심스레 눈치를 보면서 양말까지 벗어서 걸었다. 대충 100석+200석+100석의 중앙 200석이 우리 두 사람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극장 측에서 발견하고 요청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또한 오래된 극장의 낡은 정도가 두 켤레의 양말이 팔걸이에 걸려 있다고 해서 특별히 이상하거나 낯설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맨발에 양반 다리로 의자에 올린 채 '극장 오늘 우리가 전세를 내었네' 라며 희희낙락했다.


애국가와 대한늬우스와 상영 예고편을 보고는 본 영화가 시작되려고 할 때 극장 관리자들이 분주히 극장의 앞뒤를 오가며 소란스럽게 하였다. 태풍에 지붕의 일부가 파손되어 극장 안으로 비가 새는지 확인을 하는 중이었다. 다행히 상영을 중단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후로도 수시로 들락거리며 주위를 산만하게 하였다. 30분쯤 지났을 때부터 물에 빠진 생쥐꼴에서 대충 짧은 머리는 털고, 윗 옷은 손으로 짜고 했던 후속조치가 미진했던지 한기가 몰려오기 시작했고 몸을 떨지 않으려고 내내 팔걸이를 부여잡고 있었다. 중간에 나가자니 태풍을 뚫고 온 제정신이 아닌 노력과 모처럼 영화 관람이라는 호사를 누리려고 투자한 입장료가 아까워서 끝까지 버텼다. 이빨도 덜덜 떨렸다. 덜덜 떠는 서로를 보고 웃었다. 첫사랑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같이 간 사람은 안타깝게도 무덤덤한 남자 선배였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파리에 가고 싶다


영화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비가 새지는 않는지 들락거리는 극장 아저씨들, 천장을 두드리는 비바람 소리, 끝나고 집에 어떻게 가지라는 걱정으로 심란한데 추워서 덜덜 떨고 있었으니 영화가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다만, 태풍이 불던 날에 영화를 보는 미친 짓을 완수했다는 것과 '파리, 텍사스'의 파리가 프랑스 파리가 아니라 텍사스의 한 도시 파리라는 것이다.


 '파리에 가고 싶다'는 것이 남자 주인공의 첫마디다.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닌 자동차로 갈 수 있는 파리. 프랑스의 파리가 아니라, 텍사스 한복판에 있는 파리. 덩굴 식물들이 먼지 속에서 뒹굴고 있는 황량한 텍사스에 있는 '파리'말이다. 그 동네 출신들이 '파리의 여인'이라고 농담을 하듯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프랑스의 낭만적인 도시 파리의 이미지와 대비되고 오버랩되는 미국 텍사스의 파리다. 나중에 '파리'의 상징과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평론가들의 해설을 읽었지만 크게 감흥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내 몸에 각인된 태풍과 여름날의 추위가 너무 강렬해서.


파리


파리 텍사스의 파리가 그 파리가 아니듯이 지금 내가 말하려는 이 파리도 그 파리가 아니다. 불길한 예측대로 불결함과 찌질함의 대명사인 곤충, 그 파리다. 타인을 경멸하고 모욕하기 위해서 정치인들이 비유로 즐겨 사용하는 그 파리다. 인간의 자연스런 생리작용에 따른 배설물을 첨가하면 더욱 혐오스럽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애용하는가 보다. 적대적인 집단을 '파리떼'로 부르고, 상대의 감정을 격발 시키고 싶은 때 '똥파리'라고 부르듯이.


산골로 거처를 옮긴 뒤로, 편리와 청결의 결정체인 아파트 생활에 길들여진 전형적인 도시인인 우리에게 현존하는 가장 큰 주적은 벌레다. 방충망으로 방어하고 집으로 통하는 구멍이란 구멍은 실리콘으로 틀어막았지만 다양한 곤충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거나 어느새 들어와서 붙어 있다. 청소기 봉을 뽑아서 일일이 제거하는 과정이 성가셔서 원시적인 방법으로 파리채를 구입했다. 


햇살 좋은 날에 뒷마당에 앉아서 광합성을 하다 보면 어김없이 파리나 곤충들이 덤벼들며 성가시게 한다. 머리를 이리저리 피하고 손을 휘휘 저어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통에 짜증이 나서 실내로 들어와 버리곤 했다. 이제는 파리채를 손에 들고 있으면 '이 구역의 미친놈은 나야'로 벌레들에게도 인식이 되는지 한결 편해졌다. 물론, 개념 없는 녀석들이 항공통제구역을 침범하는 경우도 있는데, 빈 공간에 휘둘러 1차 경고 후에 자진하여 물러나지 않으면 인간지능 추적 및 방어 시스템이 작동되면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


똥파리


환기를 위해서 창문을 열게 될 경우에는 신속하게 방충망을 내려서 빈 틈을 주지 않는데, 구름 영상을 촬영하다 보면 방충망으로 방어를 하지 못하고 최소한의 공간으로 줄여서 창문을 열어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럴 때는 어김없이 크고 작은 날벌레들이 날아든다. 실내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에 본능적으로 이끌려서 날아오는 녀석들도 있고, 창문이 닫혀 있을 때도 고개를 들이밀고 가는 녀석들이 있는 것을 보면 많은 수의 곤충들이 하루 종일 세상의 모든 구석구석을 열심히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열려있는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게 되는 경우도 있어 보인다. 본능이라고 해도 곤충들은 참 부지런하다.


오늘도 구름 영상을 찍고 있는데 열린 창문 사이로 검고 건장한 똥파리가 한 마리 날아들어왔다. 담장 너머에 있는 들고양이의 똥 무더기에서 유유자적하던 그 놈이거나 친구 거나 가족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놈도 똥 무더기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우리 집 위생에 심각한 위해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자발적인 퇴거를 유도한 후에 불응할 시에 격추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파리와 유리창


창문 사이로 휙 날아들더니 방안을 빠른 속도로 비행을 했다. 나는 옆 방에 있던 최근에 업그레이드한 추적 격추 시스템인 파리채를 가지러 갔다. 똥파리가 침실의 이 쪽 저 쪽을 몇 번 날며 살펴보더니 침실에서는 관심을 끄는 요소가 없는지 나가기로 결정한 듯이 보였다. 물론, 생명을 위협하는 무기를 들고 있는 알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존재를 인식하기도 했을 것이다. 똥파리는 비행 궤도를 틀어서 바깥 방향을 향해서 날아가기 시작했고 아니나 다를까 창문에 제법 큰 소리로 충돌을 했다. 잠시 충격을 받고 떨어지는 듯하더니 곧 회복해서 다시 창문에 들이받았다. 당황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똥파리의 외침이 들렸다. "아, X 되었다." (변수 X에는 여러분들이 당황스럽고 짜증 날 때 사용할 수 있는 최악의 단어로 치환하시면 되겠다.)


똥파리에게 투명한 유리창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의 물질일 것이다. 경험으로 분명히 밖으로 나갈 수가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막혀서 나갈 수가 없다. 파리 과학자 협회에서 유리창의 개념에 대해서 심도 깊은 학술적 연구와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현대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외계에 존재하는 투명 물질이라고 주장하고, 일부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강력한 파장과 같은 것일 수 있으며 이를 규명하기 위해 향후에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창문에 계속 머리를 처박고 있는 우리 침실의 똥파리에게는 유리창의 개념은 차분히 앉아서 생각하고 시간을 갖고 논리적으로 정리해야 하는 난제가 아니라 당장에 해결해야 할 죽고 사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우리 집 똥파리는 답을 찾았다.


두 번째까지 머리를 처박던 파리가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창문에 이리저리 머리를 쳐 박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멍청한 파리."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냐? 너 머리만 깨지지."


똥파리는 이 것을 못하면 죽는다는 듯이 온 유리창을 돌아다니면서 머리를 찌으며 그야말로 '지랄 발광'을 했다. 그러다가, 어... 우연히 열린 창문 틈에 들이받게 되면서 쑥 빠져서 날아가 버렸다.


똥파리가 나 보다 났네


나에게는 풀어야 하는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싸매고 늘 고민을 하고 있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방법이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정리도 안되고. 그럴수록 더 오래 앉아서 생각하고 정리를 한다고 힘들어 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문제가 정리되고 해결책이 찾아질 때까지. 그래서, 나는 여전히 방 안에 가두어진 채 나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똥파리가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얕잡아보고 하찮게 여기던 똥파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자 어떻게 했는지를 보고 나는 깨닫게 되었다. 한갓 미물인 똥파리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오늘 똥파리가 준 조언은

"이 것을 못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지랄 발광을 해봐. 그럼 해결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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