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둘째 날이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사실 나는 생일에 집에 있는 걸 썩 좋아하지 않... 응, 싫다. 어렸을 적, 음력으로 생일을 쇠는 아버지와 며칠 차이 나지 않았던 나의 양력 생일. 항상 같이 하기 일쑤였고, 아버지 생일이 당연히 주였다. 손녀들과 자신의 딸, 하나뿐인 사위의 생일마다 오시던 외할머니가 내 생일에 맞춰서는 오지 않으셨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아있다. 손이 큰 외할머니 덕에 미역국은 한 번만 끓여도 일주일치 양은 충분했어서 일주일, 열흘 차이는 없는 듯 지나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나 2학년 때부터였나 일을 시작하신 나의 어머니. 그래서 나는 언니들은 했던 '집에 친구를 초대해서 하는 생일파티'도 나는 6학년 때 못했다. 약간의 불만을 어렸을 때 표현했는지, 3학년 때 이례적이게 내 생일에 교실에서 생일파티를 했다. 아마, 어머니가 담임선생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부탁한 것 같다. 그때 교실에서 그 누구의 생일파티도 한 적은 없었기에. 무튼 이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무뎌지고, 고등학생 때의 내 생일은 기말고사 날이기도 했고, 대학 때도 방학이기도 하고...
성인이 되고, 부모님이 일을 그만두시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생일에 생일케이크를 사 먹던 것이. 나는 이게 너무 부담스럽고 싫다. 어렸을 적 형성되지 않은 '특별할 날의 사랑과 관심'이 지나치게 꺼려진다. 청소년기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생일이라는 것은 그저 나에게 365일 중 하루에 지나지 않은 날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누구의 생일도 엄청나게 축하하는 편도 아니다. 내 생일도 챙기고 싶진 않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급하게 계획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렇게 긴 시간의 여행을 가질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지금은 백수이기 때문에 회사에 간다거나, 회사의 휴가를 핑계로 나간다거나, 회사의 업무를 핑계로 밖을 쏘다닐 수가 없기 때문에 일단 이 hate 한 환경을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여행이고, 대만이 되었다.
12/16월-12/20금, 타이베이 ; 12/17 화요일
타이베이에서 어디를 다녀볼까 지하철 노선표에 대략 표시해뒀다. 첫 출발지이자 마지막 여정지인 타이베이. 4박 5일, 2박 3일 동안 머무르기에 시간이 꽤 있다고 생각해서 급하진 않았다. 밤에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갈만한 곳이 꽤 많았다. But, 한국인 많은 곳에 가려고 비행기 타고서까지 여길 온 건 아니니 굳이 꼭 가야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곱창은 지나칠 수 없지. 곱창국수를 첫 일정으로 계획하고 숙소를 나섰다. 우측 대각선으로 가면 되는데, 왜인지 왼쪽 건너편에 눈길이 갔다. 10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애매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길진 않았다. 열명 정도?! 저긴, 찾아본 데서 없었는데... 바로 길만 건너면 되니 구경이라도 하자 하고 건너 줄을 섰다. 혼자 여행을 오지 않았다면 이런 급 움직임은 쉽지 않지. 흘끔흘끔 보니 구매한 사람들이 봉지에 가득 담아 가져가더라. 네 덩이를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메뉴판을 찍어 구글렌즈를 돌려보니 주먹밥이다. '마스터 오브 라이스 볼'이라는 글자가 당시엔 보이지도 않았다 ㅋㅋㅋㅋ 오, 현지식 주먹밥인가? 한 번 먹어볼까? 가격도 NT$30-55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진짜 즉석밥'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요우티아오 Fried bread stick도 보인다. 지금 생각해보니 탄수화물(밥) 안에 탄수화물(요우띠아오, 심지어 찐튀김)이 들어간 말 그대로 아주 탄탄한 아침이었다. 메뉴 설명이 영어로도 적혀있지만 어휘력이 부족한 나는 구글 번역기를 켰다. 제대로 해석되지 않았지만 지장은 없었다. 첫날에 어떤 걸 선택해서 먹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분명하게 기억나는 건 오묘하면서도 끌리는 맛이었다는 것이다. 킥인 파우더를 주먹밥 안에 뿌려주었는데 대부분의 메뉴에 들어가는 듯했다. 아주 약간의 위생을 곁들인 장갑 대용의 것을 손 위에 올리고 그 위에 뜨거운 즉석밥을, 그 위에 요우티아오, 장아찌, 가루들과 각종 선택군(참치라던가 김가루)을 넣은 뒤 밥을 잘 감싸주었다. 밥을 짓는 타이밍에 가서, 더 기분이 좋았다. 밥을 집에서 해오는 게 아니군, 아주 좋아.
이렇게 대만식 아침식사가게인가?! 그냥 나 홀로의 생각. 내가 도착했을 때의 타이베이는 좀 쌀쌀했다. 공기가 굉장히 차가웠다. 춥고 습하고 난리도 아니었던 4박 5일의 타이베이. 잠시 손난로 대용으로 감싸고 있다가 길거리에서 먹었다. 와, 뭐야 이거? 두 개 세 개 살걸! 했지만, 하나만 먹어도 진짜 배가 불렀다. 환율 45로 계산해도 겨우 1,800원이잖아? 너무 좋다, 와구와구. 본격적인 여행 첫날부터 아무도 모르는 현지 맛집을 찾아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지도 안 보고 돌아다니는 이 묘미, 한국인들의 리뷰가 가득한 곳이 아닌 곳에서 성공적인 식사를 하다니... 다녀오고 보니, 여기도 인스타에 뜨더라, 그냥 내가 못 찾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 당시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ㅋㅋㅋ
먹으면서, 배가 부른 상태로 곱창국수 가게 앞에 도착을 했다. 줄이 엄청 길다길래 줄 길면 안 먹어야지 했는데 줄이 하나도 없는 걸?! 주먹밥 때문에 배는 찼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작은 한 그릇을 구매했다. 나는 곱창을 정말 좋아한다. 지금은 치아 치료 때문에 질긴 것은 먹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로 잘 참고 있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먹어봐야지! 근데 말이다. 뭐든 큰 기대는 실망을 남긴다. 이런저런 소스도 넣어보고 했는데, 왜 유명한지 이해가 되진 않았다.
바로 옆, 코너를 돌면 행복해지는 행복당 버블밀크티 가게가 있었다. 여기도 열 명 정도만 줄이 서 있었다. 웹서칭할 때 본 거 같은데, 배가 아주 부른 상태이니 끌리지 않았다. 만드는 과정만 구경하다가 한 바퀴 돌고 왔더니 여기 줄이 엄청 길다. 지인의 추천까지 받은 행복하당행복당 밀크티. 하지만 대만 14박 15일의 여행이 끝날 때까지 먹지 않았다. 이걸 먹으러 다시 시먼딩까지 걸어 오고 싶지도 않았고(물론, 야시장 때문에 다시 시먼딩에 오긴 했지만) 1일 1음료 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토치로 구운 맛도 뭔지 알겠고, 그리고 단맛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마 더 끌리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또 걸으니 무지개 횡단보도가 보였다. 굳이 가려고 지도앱을 켜지 않아도 돌아다니면 다 인터넷에서 본 곳이었다. 발걸음이 닿는 곳 마다마다가 관광지였다. 생각보다 작았고, 통행에 방해가 되든 말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이 무지개 횡단보도는 시먼딩만의 것이 아니었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다른 지역에 놀러 갔을 때도 무지개 바닥이 있었다. 뭐, 페인트만 칠하면 되는 것이니 벤치마킹(?)은 쉽지. 바닥의 무지개를 뒤로 하고 고즈넉해 보이는 건물이 있길래 사진을 찍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가기 전보다 대만에 관련한 정보들이 알고리즘으로 엄청 뜨는데, 여기도 시먼딩 스폿 중 하나였다.
이 건물을 우로 두고 사잇길을 건너면 '원주민 거리'로 번역되는 바오타이 거리가 있다. 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유적지를 터덜터덜 걷는 것을 즐긴다.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드라이브 용량 이슈로 다 지워버렸다. 아이들 체험관에 들어가서 작은 벽돌로 집도 만들어봤다. 집 만들면서 30분은 보낸 것 같다. 다 큰 어른이 혼자 가방 메고 실실거리고 있어서 그런 건지 체험관에 들어왔던 아이들이 뚫어지게 쳐다봤다. 비켜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을까? 하지만, 자리는 넓었고 이 벽돌도 많았잖아... 그냥 본 거지???
蜂大咖啡, FONG DA COFFEE
길거리를 거닐다,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에 자연스레 합석했다. 외관을 보니 카페, 원두와 드립기구가 한가득이니 알 수 있었다. 아직 방앗간의 맛과 향을 잊지 못한 참새인가 보다. 줄을 섰다. 세련된 곳은 아니었다. 메뉴판도 안 보이고,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가격이 어떤지, 그리고 어떤 커피를 판매하는지도 알 수가 없지만 그냥 끌렸다. 나는 대만에서의 첫 커피를 여기서 경험했고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대만의 '물'장사는 쉽지 않겠구나, 엄청 비싸구나, 흠... 가격대를 보아하니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겠군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기다리면서, 리뷰를 살펴보았다. 귀찮다, 그냥 부딪혀보기로 했다. '헬로, 니하오, 원 펄-슨.'
혼자 와서 바 자리를 안내해 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쪽의 포근한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안이 꽤 넓었다, 좌석이 많았다. 내부 공간이 넓었고 고객들도 가득했다. 메뉴판을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첫 생각은 '비싸다'. 하지만 사이폰을 메인으로 하는 곳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마셔보고 싶진 않았다. 라떼는 좋아하지 않으니 생각도 안 했다. 여기 퐁다 커피숍은 대만 커피, 그러니까 대만에서 재배하는 콩을 주로 판매하는 곳이었다. 대만콩을 마셔볼까 했는데 사이폰으로 내린 에티오피아가 궁금했다. 나는 사이폰에서 에티오피아의 향을 잘 발현시키지 못했다. 다양한 국가, 다양한 프로세싱의 원두들로 매번 테스트는 했지만 결국 고객들에게 제공한 건 몰티한 원두 위주였다. 내가 만족하지 못하고 껄끄러운 커피는 서비스로라도 고객에게 제공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여기의 에티오피아가 더 궁금했다. 한 잔을 다 마시고 나서 대만콩커피를 마셔봐야지 했다. 대만은 전반적으로, 음식값에 비하면 커피값이 굉장히 비쌌다. 아침에 먹은 게 NT$40, NT$60이었는데 커피 한 잔이 NT$200. 아직 내가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으면 아깝지 않았겠지만, 퇴사한 지 세 달째였고, 커피를 목적으로 온 여행이 아니었기에 부담스러웠다. 긴 여행의 초반이라 과소비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남들이 특별하게 여겨주는 내 생일이잖아. 도망까지 올 정도면, 나도 어쩌면 내 생일을 365일의 그 어느 날들과는 -어떤 의미로든-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 테니, 내 생일을 위해 한 잔의 커피 정도는 선물로 사줄 수 있지 않을까?
역시 뜨겁다, 사이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사이폰 커피. 향이라는 기체가 보인다면, 이 커피는 향이 아지랑이처럼 보일 것만 같았다. 향긋함이 잘 느껴졌다, 굉장히 부드러웠다, 감히 말하건대 거슬리는 것 무엇 하나 없었다. 아, 메뉴판 원두명 좀 자세히 볼 걸. 아니야, 이 한 잔을 온전히 즐겨보자. 여유롭다. 안쪽 자리에 배치해 주셔서, 혼자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줄 무시하고 편안하게 오랜 시간 커피를 즐길 수 있었다.
Happy birthday to me.
작은 배, 작고 작은 배. 덩치와 불룩 튀어나온 내 배의 형태와는 다르게 많이 먹지 못하는 나. 아침을 두 끼나 먹었으니, 배가 불러옴은 당연했다. 대만콩커피는 마시지 못했다 혹은 마시지 않았다. 한 잔을 더 시키겠다는 ① 외국어로 말할 용기가 없었고, ② 그리고 여기 물가에서 내 생일에 NT$200이면 충분했다. ③ 만족했기에, 혹시 다음 커피에서 만족을 하지 못할까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잘 즐겼다.
하루는 한 편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이 날 유독 한 것이 많다.
12월 17일의 오후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