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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석원 Nov 26. 2023

스타트업에서 커리어를 쌓는다는 의미

대기업에서의 성장과 스타트업에서의 성장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장에 대한 고민을 한다. 분명 큰 회사에서 톱니바퀴로 일하는 삶보다 자유롭고 수평적인 회사에서 오너십을 가지고 일을 하고 싶어 스타트업을 선택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대표의 직관에만 의존하는 빈약한 의사결정과정, 주먹구구식 업무 프로세스, 이미 쌓여버린 레거시들, 새로운 제안을 하는 신입에게 왜 지금 방식이 최선이었는지 변명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 이게 맞는지 의심이 든다. 스타트업에서는 성장할 수 없는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스타트업이기에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다만 때로는 눈에 안 보이고,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다.



스타트업에서 개인의 성장은 사이클을 반복하며 이루어진다. 

대기업에서의 성장은 선형적으로 이루어진다. 1년 차는 1년 차의 일을 배우고, 3년 차는 3년 차의 일을 배운다. 잘 짜인 커리큘럼을 단계에 맞춰 차근차근 배워나가는 식이다. 그렇게 10년을 채우고 나면 10년 차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또한 가만히 회사를 다니면 연차가 쌓이고,  연봉이 오르고, 승진을 하고 새로운 직급이 생긴다. 이런 대기업의 인사 시스템은 성장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스타트업은 팀의 성장에 맞춰 업무가 끊임없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주니어 개발자에서 한 팀을 이끄는 리더의 역할까지 대기업에서 10년 동안 나눠서 할 일을 불과 2-3년 만에 속성으로 경험하게 된다. 경험의 밀도는 높을지라도 당연히 10년 동안 차근차근 성장해 온 사람에 비하면 업무 이해도도 낮고 경험과 역량도 부족한 게 당연하다.


대기업 10년 차와는 달리, 스타트업은 환생을 통해 다음 사이클을 시작할 수 있다. 창업자에게는 두 번째, 세 번째 창업이, 구성원에게는 팀 내 큰 역할 변화나 새로운 회사로의 이직이 그 시작이다. 즉 남들은 10년 동안 한 회사에서 차근차근 경험을 쌓는다면, 스타트업에서는 2-5년의 사이클을 여러 차례 돌리면서 경험을 더 단단히 할 수 있다. 첫 회사에서 우당탕탕하며 일을 쳐낸 기억들, 처음 리더 역할을 맡으면서 팀원들에게 실수한 기억들, 잘해보려는 마음에 전력질주하다가 번아웃이 와서 프로젝트를 터트린 기억 등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기억 속에서 배움을 찾는 과정인 셈이다. 그리고 다음 회사에서는 조금 더 나은 팀원이, 조금 더 나은 팀장이, 조금 더 나은 리더가 되어 있기를 기대한다. 



스타트업에서 개인이 겪는 성장 사이클

스타트업에서 개인의 성장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사이클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조금 더 살펴보자. 첫 번째 단계는 업무를 수행하기에 역량이 충분하여 성과를 낼 수 있는 단계이다. 창업자도 본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사업을 시작하기 마련이고, 새로 팀에 합류한 멤버도 마찬가지이다. 역할과 책임 그리고 역량까지 삼박자가 갖춰져 가장 재밌게 성과를 낼 수 있는 시기이다. 


그러나 회사가 성장하면 조금 더 크고 어려운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는 시기가 온다. 당연히 책임질 수 있는 일만 맡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지만 어느 순간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인데 주위를 둘러보니 그나마 내가 제일 나은, 그런 일들이 생긴다.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갈 때가 온 것이다. 내 역량의 벅참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해야 하는 일들이다. 시간을 박아가면서 잘하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들이 눈에 보인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답답한 마음, 도망가고 싶은 마음, 내 부족함을 채워줄 사수가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 등이 공존하는 시기이다. 


그럼 회사에서 왜 더 나은 사람을 뽑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재밌게도 설사 역량이 부족하더라도 그 사람이 최선인 경우가 많다. 스타트업에서 일을 잘한다는 건 단순 실무 역량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회사의 여정을 함께하며 쌓인 조직 내의 다양한 자본들이 있다. 그 사람에 대한 리더와 팀원들의 신뢰, 조직 문화에 대한 이해와 공감, 회사의 비전에 대한 관심, 회사의 히스토리에 대한 이해, 도메인 지식, 심지어 레거시까지 이 모든 요소들에 실제 일이 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조금 벅찬 역량과 그걸 상회하는 조직 내 자본, 그 아슬아슬한 균형 속에서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두 번째 단계가 완성된다. 


마지막은 스스로의 역할을 재정의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역할을 넘겨주는 단계이다. 벅참을 인정하고 보다 더 나은 구조를 고민하는 시기이다. 여전히 내가 최선인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하고, 역할을 재정의하여 여러 사람들과 분담하거나, 외부에서 경험이 많은 사람을 데려와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초기 멤버들의 경우 이 과정에서 박탈감을 느끼거나, 때로는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 내려와야 하는 시기가 있다.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에게는 다음 사이클, 다다음 사이클이 또 존재하기 때문이다. (참고 : 역할 내려놓기)


1. 업무를 수행하기에 역량이 충분하여 성과를 낼 수 있는 단계
2. 역량의 벅참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다른 힘으로 더 나아가는 단계
3. 스스로의 역할을 재정의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역할을 넘겨주는 단계



스타트업에서 성장을 통해 얻어야 하는 역량

단순히 성장의 방식이 다른 것을 넘어 성장을 통해 얻게 되는 역량도 대기업과는 다르다. 이력서를 채울 수 있는 그럴싸한 경력이나 하드 스킬 셋은 큰 회사가 가지는 이점이다. 그러나 그게 성장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힘겨운 상황에서 직접 오너십을 가지고 다양한 문제를 맞닥뜨린 경험은 성장의 큰 자양분이다.


첫 번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새로운 최선을 찾는 능력이다. 스타트업의 1년은 일반적인 회사와는 다르다. 1년 사이에 회사가 망하기도 하고, 인원이 두세 배로 늘기도 한다. 개인 실무자에서 갑자기 팀장이 되기도 하고, 사업 아이템이 통째로 바뀌기도 한다. 항상 최선(global optimum)의 선택을 내릴 수는 없더라도 바뀐 환경에서 최선에 가까운 선택(rule of thumb)을 빠르게 내리는 능력이 중요하다. 아름다운 선택지도 좋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는 게 최선일 때도 있는 법이다. 


둘 째는 빠른 학습 속도와 적응력이다. 모든 스타트업은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한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을 그대로 다른 상황에 적용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없어지고, 언제 어떤 지식을 어느 수준으로 익혀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뿐 만 아니라 상황이 바뀌더라도 계속 가져가야 하는 가치와 빠르게 버려야(unlearning) 하는 가치를 구분하는 게 필요하다. 


셋째는 시스템에 대한 진정한 이해이다. 시스템을 배우려면 큰 회사에 가라는 얘기도 있지만 내 생각은 반대이다. 모든 시스템에는 그 이면의 가치가 존재한다. 시스템은 없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와 있기에 포기해야 하는 가치들 사이의 저울질로 탄생한다. 공식을 암기한다고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잘 갖춰진 시스템을 경험한다고 그 이면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게 아니다. 시스템의 부재를 직접 경험하고, 단계적으로 필요한 시스템을 고민하고 조직의 변화를 몸소 느끼는 건 소중한 경험이다. (참고 :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다섯 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이다. 대기업은 각 개인의 역할과 책임의 상당 부분이 직급 체계를 통해 명문화되어 있다. 이는 각 사안에 대한 의사결정 주체를 명료하게 만들어 결정이 조직에 쉽게 흐를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스타트업에서는 직급이 없거나 적어 명시적 의사결정 주체가 없는 영역이 넓다. 즉, 까라면 까(내가 팀장이고 결정권이 있으니 결정했다)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필요하다. (참고 : 선출직과 임명직)


마지막은 불확실성을 소화하는 능력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그 간극이 인간이 느끼는 부조리이자 세상에 대한 불만이고 한탄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확실성을 얻기 위해 다른 많은 것들을 포기한다. 그러나 스타트업에 있다는 건 그런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얻고 싶은 것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참고 : 불확실성을 대하는 태도)



마치며

스타트업에서의 성장은 대기업과 그 방식도 다르고 과정도 다르고 결과도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스타트업에 다니면서 대기업에서 쌓을 수 있는 역량을 얻지 못했다며 좌절스러워한다. 스타트업 커리어는 정량화도 어렵고 직관성도 떨어져 남에게 설명도 어렵고 심지어 내 눈도 안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원래 그런 것을 어떻게 하랴. 꾸준히 노력하면 어느샌가 남들과는 많이 달라져있는 자신이 보일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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