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적 조직이 추구해야 하는 것
흔히 스타트업에 가고 싶은 이유를 물으면 수평적 조직문화를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실 수평적 조직문화라는 건 굉장히 모호한 개념이다. 스타트업이라고 해서 모든 사안에 대해 모든 인원이 동등한 의견을 내거나, 투표를 통해 의사 결정하지 않는다. 수평성과 효율성은 반대로 가는 경우도 상당히 많고, 스타트업의 빠른 의사결정은 창업자의 결단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수평적 조직은 무엇을 의미하고 왜 사람들은 거기에 만족감을 느낄까. 이는 임명직보다 선출직 중심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의 절묘한 조화가 조직의 성격을 규정짓는다.
직책과 직급이 없이 동등한 사람들이 모여서 과제를 수행할 때, 개개인의 발언권은 동등할까?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처럼 1인 1표라는 확실한 제약조건이 있지 않는 이상, 혹은 그런 제약조건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의 발언권은 동등하지 않다. 물론 원시 시대나 여타 동물 사회처럼 물리적 힘으로 서열싸움을 하지는 않겠지만, 같은 주제로 다양한 대화와 토론을 거치다 보면 그중에 더 많은 공감을 얻는 의견이 생기고, 그런 의견을 더 자주 내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몇 차례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조직의 의견을 주도하는 리더가 나타난다. 누구도 그 사람에게 명시적인 권한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 의견이 상당수 반영된 결정을 조직이 내리게 된다. 나는 이런 리더를 선출직 리더라고 부른다.
선출직 리더는 명시적 권한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때문에 '그냥 까라면 까'라고 할 수 없고, 조직을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이끌기 위해서 끊임없이 설득하고 대화하고 신뢰를 쌓는 수밖에 없다. 이는 의사결정을 내리는 순간만 노력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반박에 대비해 논리를 정교하게 다듬고 더 설득력 있는 다른 방안도 고민하게 된다. 뿐 만 아니라 조직에 새로운 구성원이 추가되면, 그 구성원의 신뢰를 얻는 일도 또 다른 과업이 된다. 물론 나머지 구성원의 지지가 있다면 새로운 구성원이 더 높은 능력과 리더십으로 새로운 리더가 될 수도 있다. 다소 시간이 많이 들지만, 일단 의사결정이 내려졌을 때 구성원들 다수의 공감과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임명직 리더는 일반적인 조직에서 직책을 가진 리더로, 명시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이다. 특정 일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가진 사람으로, 설령 다른 모든 구성원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본인 생각을 관철시킬 수 있는 결정권 자이다. 선출직 리더는 일종의 암묵지 형태로 발언권을 가지는 한편 임명직 리더는 보다 명시적이다. 임명직 리더는 명시적 권한이 있지만, 때로는 조직 구성원에게 인정받지 못한 상태 일 수 있다. 즉 임명직 리더는 끊임없이 본인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이다. 물론 까라면 까겠지만, 구성원이 뒤에서 불만을 가지거나 기계적으로 하라는 일만 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 쉽다. 애초에 조직 내에서 신뢰를 받지 못하는 사람을 임명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수평적 조직 문화를 정의하는 저마다의 방식이 있지만, 상향식 의사결정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선출직 중심의 의사결정구조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체계적으로 권한과 책임이 나뉘어 있는 대기업식 구조와 달리 직책과 직급이 없거나 적고, 조직 내 명시적 의사결정 주체가 없는 영역(그레이존)이 넓다. 그레이존은 새로운 선출직 리더가 커갈 수 있는 숨통 역할을 한다. 인턴이라도 다양한 주제에 의견을 낼 수 있고, 그 의견이 합리적이고 다른 구성원 다수의 공감을 얻으면 실제로 반영될 수 있는 그런 문화를 뜻한다.
그렇다고 선출직 리더로 이루어진 조직에서 임명직 리더를 선임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선출직 리더는 그 자체로 암묵지 성격을 가지며, 암묵지는 조직이 커짐에 따라 조직 내 비효율성을 크게 높인다. 또 긍정적인 의견 수렴이 아닌 사내 정치로 흐르거나, 경영진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조직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다. 뿐 만 아니라 다수의 공감대를 얻는 일은 많은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발생시키고 의사결정을 지연시키기도 한다.
스타트업의 이상적인 의사결정 구조는 강한 신뢰와 지지를 받는 선출직 리더가 명시적 권한을 가지고 빠른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창업자는 위와 같은 신뢰와 권한을 모두 가진 경우가 많지만, 그런 중간 관리자를 세우는 건 훨씬 어려운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선출직 리더가 자연 발생할 수 있는 환경(그레이존의 존재)과, 선출직 리더가 임명직 리더로 선임되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지금도 많은 고민과 시도를 해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