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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25. 2024

만화 좋아하면, 어른이 될 수 없나요

1. 


만화를 보면 아직 ‘애들’ 취급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만화를 보면 “넌 언제까지 그런 거나 볼 거니. 좀 ‘어른’이 돼라.”고 말했던 부모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항상 의아했던 것은, “대체 어른이 뭔데?”라는 물음이었다. 아마도 삶의 무게감을 더 느껴보라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마음속 한편에는 “어른은 만화를 보면 안 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웹툰 세대가 부모가 된 지금에 와서는 머나만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인 것도 사실이다만, 지금에서도 ‘가볍다’라는 단어에 관해서는 줄곧 생각 중이다. 어렸을 때 바라본 어른의 모습은 분명 무게감 있고 묵직한 것이었지만,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어서 달라진 건 소화가 잘되지 않거나 피로회복이 더뎌졌다는 점뿐, 과거의 ‘나’는 여전히 비슷한 취향과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 극적인 변화를 동반하는 게 아니라, 그냥 서서히 나이를 먹을 뿐이었다.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에서 ‘가볍다’라는 단어를 말해보면, 아마도 만화는 ‘유년기’에 머물러있는 쪽이 아닐까 싶다. 만화가 그 외견과 형식을 작가의 손끝으로 모두 결정하는 매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만화가 갖는 상상력의 힘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연상케 한다. 어렸을 때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따라 이 글에서는 ‘만화’를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지 않아 자유분방한’ 매체로 정의하면서 이를 ‘아이’에 빗대고자 한다. 모든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될 뿐이라면, 아이로 남는 일은 어른이 되지 ‘못’한 게 아니라 아직 가능성이 남아있는 존재일 뿐이라고 보고 싶다. 어른이 책임을 지는 존재이고 그렇기에 행동의 운신에 제약이 있다면, 이 경우 만화는 자신에게서 어떠한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일 수 있을 테다. 만화는 책임을 내려놓고서 과거로 도피하는 일이 아니라,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점지한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인 매체이다. 


네이버 웹툰의 <상남자>는 기업의 사장이었던 한유현이 과거 사원 시절로 회귀한다는 내용을 다룬다. 과거로 돌아간 한유현은 자신의 기억과 사장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노하우를 토대로 미래를 바꾸려 노력한다. 여기서 ‘미래’란 사장이나 회장처럼 특정한 직함에 오르는 게 아니라, 과거의 자신이 회사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선택해야만 했던 것들이다. 그는 ‘성공’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선택’ 받지 못한 동료를 구하려 노력한다.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과정을 중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 이미 확정된 미래를 토대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미래가 고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근래의 회귀물은 더 나은 미래를 추구했던 과거의 회귀물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현 상황이 후회스럽기에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런 미래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가 중점이 된다. 이는 독자가 작품의 결말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하게끔 함으로써, 작품에 할애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근래의 회귀물은 특정한 결말을 정해두고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어떻게 보면 결말이 바뀌지 않아 그리 흥미롭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작품의 주 독자층을 고려하면 이는 ‘어른’의 입장을 부각하는 효과가 있다. 주로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이 작품에서는 이미 삶의 경로나 신분이 어느 정도 고정되어버린 이들이 많다. 이미 직장을 다니는 상황이라면 소위 말하는 ‘업종’이 생기므로, 다른 분야로의 전직은 불가하거나 어려워진다. 한편으로는 취업에 성공했더니 연애나 결혼 같은 일이 남아있기도 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스스로에 주어진 선택지는 점점 줄어들어서, 직장인이라면 대개 자신이 어떤 결말을 마주할지를 체감하게 된다. 즉, 회귀물은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런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어른으로서는 최악의 결말을 마주하지 않게 해준다. 이미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말은, 아이였던 때와는 달리 어른에게서 든든한 ‘안정책’이 되어주는 셈이다. 


2010년에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된 <남기한 엘리트 만들기>는 ‘아이의 몸에 들어간 어른’이라는 설정을 토대로 진행된다. 이 설정은 ‘몸 바꾸기’ 장르의 한 갈래로써, 어른인데 아이처럼 행동해야 하는 일에서 오는 격차로 재미를 주었다. 작품 밖의 독자와 주인공 본인만이 아는 사실이 이곳 세계 안에서는 감춰짐으로써 독자와 주인공 사이에 공통분모가 생겨난다. 자신이 ‘어른’이었다는 사실을 감춰야만 하는 이 세상은, 어떤 면에서 자신이 ‘아이’일 뿐이라는 점을 감춰야 하는 현실 사회와 정반대다. 모든 어른이 한때 아이였던 때가 있었지만, 우리는 어른에게서 ‘아이’의 모습을 지우려 부단히 노력한다. 마치 어른은 아이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거나 아니면 불이익을 받는다고 여기는 것만 같다. 말하자면 어른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며, ‘아이다움’을 드러내는 일은 그에 대한 배신처럼 여겨진다. 즉, <남기한>의 서사는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과도 같았다. 


어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자신의 미래를 하나에 묶어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상남자>가 어쨌거나 사장이 된 미래에서 출발하므로 중간에 인물이 ‘실패’를 겪을 일이 없다면, <남기한>은 같은 미래로 돌아가서는 안 되므로 인물은 그와 같은 과거를 재현하는 일에 ‘실패’해야만 한다. 두 작품은 돌아가야 하는 곳과 출발하는 곳을 각각 고정점으로 삼음으로써 반대지점을 열어둔다. <상남자>가 과거를 열어둔다면 <남기한>은 미래를 열어두는 식이다. 이와 같은 전개 방식에서 우리는 만화가 ‘젊음’을 묘사하는 방식이 두 갈래로 나뉜다는 점만이 아니라, 이 둘이 정확히 겹쳐지는 대목을 생각해보게 된다. 누군가의 젊은 시절은 과거와의 이별이면서 미래에 대한 설렘이기도 하다는 점, 즉 ‘열림’과 ‘닫힘’을 동시에 획득하는 시기라는 점 말이다. 그러니 ‘어른이 되라’는 말은 사실상 ‘아이로 남기를 포기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중간’을 조망하는 일을, 우리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은 타인이 자신에 간섭하면서 진로를 정해주는 일에 반대하고는 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아이들은 꿈을 꾸는 존재로서 청춘물의 주된 연령대로 설정된다. 이를 따라 청춘물은 특히 ‘선생님’의 존재가 부각되며, 이와 같은 인물상은 넓게 보았을 때 ‘스승’의 카테고리까지 확장된다. 청춘물에서 ‘스승’은 어른의 카테고리에 속하지만, 다른 어른과는 달리 가르침을 준다는 점에서 아이의 세계에 포섭된다. 가령 네이버 웹툰의 <셧업앤댄스>는 연습생 생활을 하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낙방한 서원준의 이야기를 다룬다. 작품은 원준과 다른 부원들의 이야기를 그려가는 과정에서 자아 찾기와 가족 갈등, 친구문제를 다루는데, 사실 이들 문제는 ‘아이’의 시점에서 그려질 뿐이다. 즉, 어떤 세계든 간에 아이들은 내부자로써 외부 세계에 대응하는 일에 다소 미숙하다. 이 점에서 에어로빅부의 선생으로 취임한 조원선은 그런 아이들의 세계를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특징적인 것은 취업준비생인 조원선의 모습이다. 분명 30살이나 먹었으니 ‘어른’이라고 볼 수 있을 조원선은, 아직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으니 우리가 아는 선에서의 ‘어른’은 아니다. 따라서 조원선이 아이들과 어울리며 벌어지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 아이 대 아이로의 일처럼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예전에는 결혼해야만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보기도 했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면 소위 먹여 살려야 할 ‘식구’가 늘어나므로 그만한 책임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결혼하면 운신이 가족으로 좁혀진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결혼’은 아마도 중간으로서의 역할이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사례는 ‘어른’의 의미를 단순히 성년이 된 이후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책임질 수 있게 된 사람, 소위 ‘한 사람분의 몫’을 하는 이로 확장한다. 성년이 되거나 가족을 꾸려야만 ‘어른’이 된다는 말은, 법적으로 자신을 책임질 수 있고 하나의 ‘가족’을 꾸린다는 점에서의 ‘1인분’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조원선은 철이 들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고등학생이랑 같이 있어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조원선은 고등학생과 마찬가지로 젊고, 어리다. 이들 모두를 포함한 에어로빅부 전체가 자신의 꿈과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 이처럼 젊은 시절의 고민이 대개 ‘무엇을 하며 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이어지는 일은, 그만큼 미래가 고정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때, ‘열린 미래’는 만화가 갖는 유동성과 개방성에 긴밀히 연결된다. 만화는 정해진 틀 안에서 무언가를 그려낸다는 점에 다른 매체와의 공통점이 있지만, 틀과 틀 사이를 연결하는 일에서 그와 같은 ‘틈새’를 버리지 않는다는 점으로 차별화된다. 영화나 연극이 프레임 바깥에서 양분을 끌어온다면, 만화는 컷과 컷 사이조차 거대한 형식의 일부 삼음으로써 ‘보여주려는 것’과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모두를 한 자리에 모은다. 이를 따라 다른 매체가 항상 ‘바깥’을 의식하는 것과는 달리, 만화에서는 양립이 주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2. 


만화가 주로 ‘소년’이나 ‘청년’의 열혈 속성과 연결되는 일은, 이들이 그만큼 꿈을 꾸면서 이를 실행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일 테다. 무엇이든 될 수 있던 이 시절을 우리는 유년기로, 그리하여 우리는 어른의 의미를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불렀다. 따라서 결혼 제도가 의미하는 게 ‘1인분’ 이상을 해내야 한다는 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결혼하면 어른이 된다고 보았던 관점에서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슬하의 구성원 모두를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 필연으로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른에게 ‘미래’는 가족의 미래를 따라가는 것이었고, ‘아이’를 키운다는 건 곧 어른이 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족의 의미를 회고하면, 만화에서 ‘어른’의 관점은 컷과 컷 사이의 구성 방식에서 그 진가가 드러난다. 만화가 ‘보여주려는 것’과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모두를 끌어안는다면, 가족을 꾸리는 일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 곧 ‘어른’이 되는 일이라는 점에서 아이와 어른이라는 상반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다. 


만화란 결국 가족인 게 아닐까. 최근 인기를 얻는 일본 애니메이션 <스파이 패밀리>를 생각해보자. 이 애니메이션은 동국과 서국의 스파이가 서로 위장결혼을 하고, 위장으로 초능력자인 아이를 입양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만화는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이들이, 서로의 위장 신분을 통해 하나가 되는 과정을 그리는데 이런 일은 모두 ‘가족’의 범주에서 그려진다. 이들이 보여주려는 게 ‘위장 신분’이라면,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건 ‘실제 신분’인데, 이 두 가지 모두가 한데 어우러짐에서 오는 차이가 작품의 주된 감정을 구성한다. 컷과 컷 단위로 구성되는 만화도 그렇다. 가족 사이에서는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보여줄 수 없으며, 더 나아가서는 기쁜 것이자 슬픈 것인 일이 한 자리에 공존하기도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과 아이가 된다는 것이 동시에 자리하기도 하며, 가족은 모두가 한 사람의 몫을 하기보다는 가족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한 사람분’이 된다. 


어른은 ‘보여주려는 것’과 ‘보여주기 싫은 것’ 모두를 감내하는 형태다. 만화가 청춘을 잘 그리는 것은, 어른스러움을 보여주고 싶으면서도 아이다움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마음을 그리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청춘물이라면, 청춘물은 그와 같은 두 가지 면을 한 자리에서 보여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모든 어른은 내면에 소년/소녀였던 시절을 간직하면서 살아간다. 이 장르에서 인물은 아이이기를 포기하면서 어른이 되거나, 혹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아이다움을 잃어버린다. 말하자면 ‘어른’이 되는 일은, 단순히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선택을 동반한다. 가령 이주영은 네이버 웹툰 <쌉니다 천리마 마트>를 다룬 논문인 「IMF 외환위기부터 삼포세대까지」[1]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실직으로 인해 한 가정의 ‘어른’에서 내려와야 했던 남자들에게, ‘소년’은 구조/조정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기업의 구조조정은 기업이 생존을 위해 자사의 구성원을 ‘선택’하는 일련의 과정을 뜻한다. 같은 의미에서 ‘어른’은 생존을 위해 내면의 소년/소녀를 잘라내야 했다. 세계는 어른이 되기 위해 ‘아이다움’을 버릴 것을 요구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어른’은 생존을 위해 선택된 ‘가치’에 가깝다. 네이버 웹툰의 <찌질의 역사>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주인공이 첫 연애를 시작하고, 또한 다른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찌질함’이 주요 소재인 웹툰이다. 장르로 보면 연애물보다 청춘 성장물에 가까운 이 만화는 자신의 20대를 ‘유년기’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이를 성장을 위해 필요했던 자양분으로 그리고 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아이다움은 미성숙함과 같은 뜻이 아닐 수 있다. 아이다움은 우리가 간직해야 할 유년기일 수도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대개 성장판이 닫혔다는 말과도 같아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이나 가능성을 크게 제약해 버리곤 하니 말이다. 이 만화에서 ‘아이’는 어른이기 위해 구조조정 되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만화는 한 개인이 아이를 거치지 않고서도 어른이 되는 방식을 보여주거나, 혹은 그와 같은 점을 긍정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어른의 의미를 두고서 ‘자기 결정권’에 중점을 두곤 하는데, 이를 따르자면 사회구성원으로서 한 명 분의 몫을 할 수 있고, 또한 선택권이 있는 만큼 그러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중요한 건 ‘어른’에게 ‘선택’은 강제가 아니지만 ‘책임’은 강제라는 점이다. 어른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게가 있으므로 앞으로의 거취를 결정하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선택지가 ‘좁아진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어른에게 ‘선택’은 ‘대안이 없다’는 일에 내몰린 결과고, 어른에게 선택은 아이가 말하는 선택과 그 의미가 다르다. 어른이 ‘찍을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한편, 아이는 ‘어떤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른에게 ‘선택’라는 말은,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일에서 오는 즐거움보다 더는 되돌릴 수 없게 되어버리는 일들을 따라 책임과 압박감을 느끼는 일에 더 가깝다.


네이버 웹툰의 <케찰코아틀>은 다빗편과 헤수스편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헤수스편의 주인공이 살린 아이 ‘다빗’이 다빗편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냉혹한 킬러인 헤수스는 조직에서 내린 명령을 철저히 이행하는 냉혹한 킬러지만, 납치 상대였던 다빗을 구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경변화는 그를 어린 시절의 냉혹함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어른’이 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적들은 냉혹했던 헤수스가 더는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를 비판한다. 시야가 좁아졌음을 조롱하며 아이를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이 지켜야 할 단 하나를 위해 나머지 세계 모두를 희생하는 일이다. 헤수스는 다빗을 구함으로써 자신의 유년기를 구한다. 구원을 바랐던 소년이 타인을 구원할 때 이들은 서로 가족이 된다. 이후 다빗편에서는, 헤수스 사후 그의 조직에 거둬진 다빗이 자신의 새로운 ‘가족’들과 함께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다빗에게 가족은 곧 세상 전부기에, 희생할 수 없는 단 하나가 된다.  


다빗의 적은 다빗을 두고서 ‘가족’이라는 관계에 매몰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와 같은 냉소가 없다는 점이 헤수스와의 결정적인 차이이며 그로 인해 헤수스보다 ‘약할 수밖에 없다’고 조롱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적과의 싸움에서 다빗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건, 헤수스와 마찬가지로 세상 전부를 구하는 단 하나였다. 두 사람은 가족의 일원이 됨으로써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그들은 삶을 살아갈 이유가 가족 자체를 구함에 있는 게 아니라,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자신에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따라서 이는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성숙’의 맥락에서 어른의 의미로 이어진다. 아즈마 히로키는 『관광객의 철학』에서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거치지 않은 개인이 곧장 보편과 연결되는 회로를 모색하는 것, 서브컬처 평론의 용어로 옮기면 이는 ‘세카이계’의 문제다.”[2]라고 말한다. 이 논의의 연장선에서 투표를 한다는 건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 사회를 선택하는 일, ‘자기’를 의탁할 정부를 선택하는 일이다.


가족을 꾸림으로써 어른이 되는 것이라면, ‘투표’는 정부를 꾸리는 일에 참여하며 자신이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를 고민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투표가 어떠한 선택의 수단이라면 다빗과 데이빗은, 자신의 유년기와 연결되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 자신의 가족을 선택했다. 이를 따라 가족이라는 말을 ‘보편’의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 아즈마가 말하는 ‘세카이계’의 문제란, 개인의 문제가 어른을 거치지 않고서 세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어른’을 배제한다. 대표적으로는 <날씨의 아이>(2019)나 <너의 이름은>(2016)같은 신카이의 작품을 떠올려볼 수 있고, 이와 같은 작품에서는 ‘어른’이 배제되고 ‘아이’가 전면에 드러나곤 한다. 아이와 아이가 서로 만나 큰 세계의 문제를 맞닥뜨리는데, 이들은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어른이 풀어야 할 문제로 보지 않고서, 그들 자신의 문제이기에 이를 회피하지 않고서 그대로 마주 본다. 


<날씨>에서 ‘세계’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점에서 “세계가 아이였던 때부터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이 세계가 아직 미숙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아이는, 그래서 이를 어른이 되지 않고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여긴다. 즉, 세계의 문제가 아이의 입장으로 곧바로 받아들여진다. 아이는 ‘한 사람’의 몫으로 취급되지 않지만, 이들 세계에서는 ‘어른’이 되지 않더라도 스스로 의견을 내어 거취를 선택하는 일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어른이 만화를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었던 예전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만화가 아이의 전유물이었던 시절에 ‘가족’은 그 자체로 작은 세계와도 같았다. 가족을 나선 이가 다시금 가족을 꾸리게 되는 세상은, 다빗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는 어떻게 해야 ‘유년기’를 세계와 연결할 수 있을까.”라고 할 수 있다. 세계가 끝없이 태어나야 한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이들 세계를 부수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3. 


 세계는 혼자만의 힘으로 바꿀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니까, 어른은 아이가 자라 세상에 부딪힐 때까지 이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어른은 아이가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자랄 때까지 보듬줄 필요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만화’는 아이다움에 붙들린 매체로써 ‘성장’을 위해서라면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화는 ‘보여주고 싶은 것’과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을, 마땅히 선별해서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미숙함이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것이라면, ‘성숙하다’라는 건 가족의 의미가 각별하고 사람 간의 인연이 특별했던 시절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어리다’라는 말이 감정의 미숙함을 뜻한다면, 이는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정도의 나이를 뜻했다. 어쩌면 그래서 어른은, 자신의 세계가 좁아지는 일을 경험하기에 ‘만화’를 시샘했던 게 아닐까. 사회에 나서는 이들에게는 ‘약점’을 가려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구조조정을 당하지 않으려면, 타인의 ‘유년기’를 드러내야만 했다. 


자기만의 세계를 갖는 것은, 가족을 나설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일까. 이 질문에 아즈마는 ‘어른을 통하지 않고서도 아이가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른으로서의 자각을 거치지 않은 아이가 곧바로 보편과 연결되는 회로를 모색하는 것은, ‘가족’을 꾸리는 일이라고 말이다. 네이버 웹툰의 <닥터 프로스트> 중 3부에서는 프로스트 박사가 정신병동에 입원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이 에피소드에서 그려지는 박사의 내면은 상처받은 어린 시절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을 다룬다. 무감각해 보이던 박사의 표정은 사실, 겉으로 약점을 드러내기 싫어할 뿐이었으며 사실은 유년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갈 뿐이라는 점이 밝혀진다. 박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겉으로 드러내기 싫어서, ‘감정’과 함께 이를 마음에 묻어두었던 셈이다. 이를 따라 만약 만화가 유년기에 해당한다면, 유년기를 약점으로 여기는 일은 우리가 왜 ‘어른’이 되려면 ‘만화’보기를 지양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


분명, 어른의 정의는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고 우리는 앞서 말했었다. 아즈마의 의견을 따르자면, 유년기를 세계와 직접 연결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유년기를 책임질 수 있다. 여기서 만화는 ‘유년기’를 대표하는 매체로서, 어른이 된 우리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면을 드러낼 수 있다. 이른바 ‘세카이계’라는 게 ‘어린아이들이 어른을 거치지 않고서 곧바로 세계의 문제를 책임지려 든다’라는 것임을 떠올려보자.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는 것인데, 이는 ‘보여주고 싶은 면’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책임=지켜야 할 것’에 가깝다. 사회적인 의무와 당위성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가 투표에 참여하는 것도, 결국은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년기에 어떠한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다면, 이는 아이에게 능력이나 권한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지켜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화는 보여주려는 것과 보여주기 싫은 것이 한 자리에 공존한다. 이를 따르자면 아이가 지켜내야 할 건 ‘보여주기 싫은 것’이다. 프로스트 박사가 자신의 유년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 가둬놓으려 했던 건 그 때문이다. 프로스트 박사는 자신의 감정을 지켜내려 했고, 그래서 이를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프로스트 박사가 항상 유년기의 모습을 유지했던 건 ‘어른이 되지 못한다’는 소년성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고자 함이었다. 이윽고 <닥터 프로스트>의 4부는 3부에서 정신병동에 갇혀있던 박사가 퇴원을 한 이후를 그린다. 3부에서 유년기의 기억을 마주하고서 감정을 되찾은 박사는, 특유의 날카로움을 잃어버려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된 상태다. 그러던 중 박사의 제자인 윤조교가 범인을 추궁할 때, 그녀는 범인의 도발에 넘어가 분노에 사로잡히고야 만다. 광화문 광장에서 터질 음모는 한국사회의 가까운 과거를 호명함으로써 윤조교의 심경을 건드린다. 이 장면에서 닥터는 울음이 터지려는 윤조교를 끌어안으며 다음처럼 말한다. 


“나도 한때는 그 터널 안에 있었어.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길어. 하지만 터널은 항상 끝이 나게 되어 있어. 터널의 끝에는 빛이 있어.” 


서브컬처의 영향을 받은 만화평론에서도, 세카이계의 문제는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서브컬처 평론에서 세카이계는 두 소년소녀가 곧바로 세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어른’의 개입을 지양하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까지 논의한 바를 따르면 이는 ‘보여주려는 것’을 지양하는 일이다. 밖으로 꺼낸 말을 책임져야 한다면, 그런 말을 꺼내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어른이 되는 일은 어른에 맞는 사고와 행동을 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만화’가 아이들이 보는 매체로 인식된다면, 이는 밖에 보여주기 싫은 것이었을 수밖에 없다. 내면의 소년/소녀를 아직 간직한다는 건,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말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래서 세카이계가 문제 해결을 위해 어른을 거치지 않는 것은, 아이에게 너무 과중한 책임을 묻는 게 아니다. 내면의 소년소녀를 감추거나 숨겨야 할 약점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키덜트 문화나 서브 컬처 문화의 활성화는 어른에게서 책임의 무게를 아이와 분산하는 듯한 느낌도 있다. 


만화 매체의 변화는 만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견인한다. 스크롤 형태의 웹툰은 점점 더 컷과 컷 사이의 경계를 허물면서 이를 따로 구분 짓지는 않는 듯 보인다. 컷과 컷 사이의 ‘틈’을 활용했던 전통적인 만화 연출은 웹툰 시대에 들어 희귀한 게 되었다. 스크롤 연출은 동양의 풍경화에 가깝게 활용되면서, 최근에는 칸을 나누지 않거나 혹은 인스타그램식의 구조를 활용한 컷툰으로도 발전했다. 전자의 경우는 컷이 아예 없고, 후자는 프레임이 곧 화면 전체에 확대됨으로써 컷의 외부 틈새가 없다. 이러한 점에서 만화에 대한 ‘가벼움’은 열린 미래와 가능성에 대한 동경인 듯 보인다. 어른에게 미래가 닫히는 쪽이라면, 아이에겐 정반대다. 네이버 웹툰의 <더 복서> 같은 경우, 유년기의 풍경과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을 긴 스크롤 연출로 엮음으로써 과거에 날리는 펀치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이는 그런 아이가 자라서 된 게 현재의 류라는 점을 보여주면서, 이들이 서로 간에 같은 존재이기에 결국 자기를 구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걸 보여준다. 


이와 같은 구조적 변화는 우리 사회가 ‘만화’라는 매체를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한 것 같다. 결혼 적령기가 올라가고, 웹툰을 보며 자랐던 세대가 기성세대에 진입하면서 ‘만화’는 더는 유년기가 아니게 됐다. ‘어른’이 만화를 본다고 해서 딱히 뭐라 하지 않을 만한 분위기가 됐고, 이제 만화는 보여주고 싶은 것과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의 ‘사이’가 아니라 삶 전체를 연결하는 문화가 됐다. 다시 말해서 ‘유년기’의 문화였던 만화는, 그 자신으로도 어른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만화를 ‘가벼운 것’으로 취급하던 시절은, 공부나 취업 같은 삶의 과업이 비교적 진중하고 무겁게 다가오는 것에 반해 만화나 게임 같은 취미는 삶의 중심을 잡는 것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하지만 생각해보건대 만화에서 ‘가볍다’는 말은, 여기에 내용물이 없거나 중심이 잡혀 있지 않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섞이지 않는 정도의 밀도는, 작품을 감상하며 현실을 떠올리거나 그에 방해받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만화를 유년기로 가정하는 일을 재론하고 싶다. 앞서 ‘유년기’를 두고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태’라고 가정했던 것을 떠올리자. 한 문화를 경험한 세대가 사회에 진출할 때, 문화는 자신의 경계를 상부로 밀어낸다. 두 세계는 하나의 비커에 공존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 둘 사이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단지 육안으로 두 세계가 뚜렷이 분리되어 보일 뿐이다. 이는 우리가 이들 간의 밀도차를 두고서 비교적 진중하게 여기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 그러나 어른에게 만화가 갖는 의미는, 이들에게서 아직은 삶의 가능성이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가벼움’은 ‘죽음’이나 ‘해고’처럼 어두컴컴한 어른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생동하는 쪽의 미래가 남아있음을 말해주는 일이다. 어른은 아이를 구조조정하는 게 아니라, 구조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조정받는다. 만화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존재가 아니라, ‘섞이지 않는 정도의 밀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어른인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든든한 기반이 되어준다. 


그러니 “어른이 되면 만화를 보면 안 되느냐”는 질문에는, 이런 답을 들려주고 싶다. 모든 만화는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그걸 자신의 외피로 삼을 뿐이라고. 어른이 된 우리는, 우리가 만화를 생각하며 자신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속내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노라고. 만화는 우리가 세계를 통하지 않고서도 자신을 끌어안는 방법인 셈이다. 


-마침-     


1)이주영, “IMF 외환위기부터 삼포세대까지: 웹툰[쌉니다 천리마마트] 와 텔레비전 드라마 <쌉니다 천리마마트>의 ‘크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정치성,『비교문학』91 (2023): pp.227-257.

2)아즈마 히로키, 『관광객의 철학』, 안천 역, (서울: 리시올, 2020)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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