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Jan 19. 2023

땅 끝으로 빨려드는 천둥의 물보라

모시 오아 툰야(Mosi-oa-Tunya) 혹은 빅토리아 폭포


- 얘들아. 빅토리아 폭포는 이름이 따로 있어. 모시오아툰야라고, 천둥의 물보라, 천둥의 연기란 뜻이야.

- 근데 왜 빅토리아 폭포라고 해?

- 리빙스턴이라는 사람이 이 폭포를 처음 보고 자기네 여왕 이름을 붙였어. 나무는 싫지만.

- 왜 싫어해? 처음 발견해서 이름 붙인 거 아니야?

- 자기가 처음 와 봤을 뿐이지, 폭포가 없었던 게 아니잖아. 이미 여기 사람들이 오래 부르던 이름도 있구. 니네 맨날 나들이 다니던 매봉산을 나무가 어느 날 ‘발견’ 했어. 그리고 감동해서 오늘부터 이 산은 나무 산이야, 다들 그렇게 불러 하면 좀 웃기지 않니?

- 그러라고 해도 우린 안 부르지! 근데 여기 사람들도 다 빅토리아 폭포라고 부르잖아.

- 처음엔 힘센 사람들이 우겨서 어쩔 수 없었을 거고, 이제는 오래 지나서 익숙해졌겠지. 그래도 원래 이름을 기억해 주는 건 중요하니까 모시오아툰야 기억해 줘. 뜻도 멋지지 않아?


리조트 스탭에게 ‘모쓰-오-툰니야’ 하고 본토 발음까지 배우고 나니, 아이들은 “빅토리아 ㅍ..” 하다 내 눈치를 슬쩍 보며 “아니 모시오아툰야..” 하고 말을 고친다. “너희 편한 대로 불러도 돼, 나무도 빅폴이 짧아서 편해. 기억은 하자는 뜻이야.” 하고 다독이며, 내가 또 꼬맹이들에게 너무 세게 말했나 잠깐 반성한다. 


그래도 빅폴에 함께 오면 꼭 해 주고 싶은 얘기였다. 토착민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고 제일 어울리는 이름을 부른다. 오로지 침입자들- 일부 탐험가들을 포함해서-만이, 오만방자하게 저희들의 이름을 붙여둔다. 몹쓸 습관. 나쁜 흔적.


호주에서 지낼 때, 호주 아이들은 산을 그리라 하면 뾰족한 세모 대신 평평한 굴곡을 그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리빙스턴의 아이들도, 폭포를 그리라 하면 스케치북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긴 선을 하나 그리고 바탕색처럼 물빛을 칠하지 않을까 않을까 싶다. 모시오아툰야는 골짜기 사이로 떨어지는 몇 가닥의 물줄기가 아니라, 잘린 케이크처럼 쩍 갈라진 절벽으로 세상의 물이 다 빨려 들어가는 듯한 폭포니까.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위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친 물줄기가, 다시 거대한 물안개를 피워 올리며 솟아오른다. 햇빛에 부딪친 물보라는 무지개를, 곧잘 겹무지개를 피워낸다. 우기 끝엔 사방에서 샤워기를 틀어놓은 듯 눈을 뜨기조차 어렵고, 대화도 어려웠다. 이 소리, 이 광경이 옛날 사람들에겐 경이와 공포의 대상이었으리라. 그래서 폭포의 노여움을 잠재우고 부족을 지키기 위해 약한 존재를(특히 여자를) 제물로 던진 세월이 얼마일까. 예나 지금이나, 두려움은 크고 작은 허튼짓을 낳는다. 


아이들과 두 시간을 넘겨 걸었다. 폭포가 워낙 길어 잠비아와 짐바브웨에 걸쳐 있으니 국경을 넘어가 짐바브웨 쪽의 폭포도 보고 오자 한 터였다. 실은 폭포의 물보라를 시원히 맞으며 걸음에도 꽤 뜨거운 날이었고, 오전의 한나절 수영으로 아이들은 이미 체력을 절반쯤 써 버렸다. 빅폴에 처음 오는 나옹, 두 번째인 솔 율 모두 폭포의 위용에 압도되는 듯 보였지만, 어린 감탄은 벼랑 꼭대기의 물줄기가 협곡에 채 닿기도 전에 흩어졌다. 아직은, 뛰어들어 수영도 못하는 이 폭포를 끝까지 걷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게 당연하지. 


두 나라를 잇는 빅토리아 폭포 다리에 이르자 꼬맹이들이 파업에 돌입할 기세라,  J가 자전거 인력거를 잡아 왔다. 모터는커녕 기어도 없는 자전거에 매단 좌석만 봐도 운전할 엄두가 안 나는 범인들과 달리, 깡마른 드라이버는 아이들만 태워 달라 만류하는 우리를 안심시키며 끝내 모두를 구겨 태웠다. 너그러운 그에게 행운이 따른 것일까? 폭포를 보고 나오는 동안 기다렸다 다시 우리를 잠비아 국경까지 데려다 주기로 한 그는, 결론적으로 긴 시간 대기 없이 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짐바브웨가 한국 사람에게 무비자 국가가 아니라는 걸, 우리 중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포털에 '짐바브웨 비자'라고 검색만 해도 나오는 단순한 사실을, 잠비아 출국 도장을 다 찍고, 짐바브웨 사무소로 넘어가 "돈 내!"라는 말을 듣기까지 아무도 찾아보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다. 여권을 받은 출입국사무소 직원이 비자피를 말하는 순간에도 나는 의심 없이 되물어 그녀의 실소를 샀다. 


- 돈? 아.. 있잖아, 무비자인 것 같은데. 혹시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돈 내는 거 맞아?  

- 헤이, 우리 무비자였던 적 한 번도 없어. 한 사람당 30달러야. 놉. 노 프리 비자. 놉. 


이미 폭포에 관심 꺼진 지 오래인 초딩 셋을 데리고, 길어야 한두 시간일 산책을 위해 비자피와 공원 입장료로 200불 이상의 돈을 쓸 수는 없었다. 여러 웃음이 섞여 흐른다. 출입국 관리의 실소. 우리의 멋쩍고 허탈한 웃음. 폭포에 못 가 신난 아이들의 웃음. 발길을 돌려 나오는 우리를 맞는, 더 이상 환할 수 없는 드라이버의 미소. 그는 돌아가는 길에도 우리 모두를 태우겠다는 의지가 굳건했다. 오르막길에서 잠깐 인력거를 민 J는 몇 분만으로도 숨이 턱에 차 했는데, 나이도 많아 보이는 이 드라이버는 어떻게 끝까지 여유가 있는 걸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돌아온 호사에 대한 보답으로, 약속보다 훨씬 짧은 거리였지만 조금 더 많은 돈을 드렸다. 아무런 나쁜 일 없이 마감하는 운수 좋은 날이 되시기를. 


저녁은 리빙스턴 시내의 로컬 음식점에서 먹었다. 남편이 없으니 메뉴 선택의 용기가 줄어든다. 애벌레볶음과 악어튀김을 저렴한 가격에 파는 곳이었지만, 어른들이 기껍지 않으면 아이들도 낯선 음식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기 어려우니 자제한다. 음식은 고맙게 먹어야지 시켜 놓고 구경해선 안 된다는 신조를 사진 나는 역시 조선의 중년 여성인 것이다. 대신, 잠비아 사람들이 좋아하는 생선 브림(Bream)을 한 마리 그대로 튀긴 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옥수수 가루를 개어 찐 시마(nshima)와 함께. 


좋은 하루가 또 지나갔다.



이전 01화 출발전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