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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Jan 02. 2023

여행(Safari)의 기쁨

보츠와나 초베 국립공원 (1/3) : 사바나, 다른 사계로 들어가는 길 

보츠와나 국경은 이른 아침부터 붐볐다. 우리를 마중 나온 사파리 오픈 지프는 마치 거대한 코끼리 같다. 코끼리 등에 오르자 어른 아이 할 것 없는 설렘이 둥실둥실 떠다닌다. 우리 드라이버이자 가이드인 지카(Chika)와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사바나에서의 사흘이 시작되었다. 초베 국립공원(Chobe National Park). 이름은 공원이지만, 경기도보다 더 큰 땅이다.


자 이제 동물들의 터전(home)으로 들어갑니다. 많은 동물들을 만날 거예요. 그 주민들을 존중(respect) 해 주세요. 큰 소리를 내거나 놀라게 하지 말아 주세요.

비록 표현이나마 동물들을 구경하러 간다 하지 않고 만나러 간다 하는 말이 미덥고, 그들을 존중하라는 진중한 말이 와닿는다. 비단 동물들 뿐이랴. 사바나라는 거대한 세계에 첫 발을 딛는 태도로, 존중하라 Respect! 보다 더 적절한 조언은 없으리라.


초베 사파리의 시작은 보트 크루즈였다. 지카는 어른 셋 아이 셋, 우리 일행 여섯만을 태운 작은 보트로 세 시간 동안 초베 강을 유영했다. 습지 사이로 흐르는 강을 미끄러지듯 따르는 보트는, 가끔 쇄빙선처럼 수초를 가르고 들어가 숨죽이고 동물들을 지켜본다.


동물들은 우리 생각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강의 최강 포식자 악어는 삐죽빼죽한 이가 다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도, 뭍에 나와 체온을 조절하는 중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풀만 먹는 순한 하마는 예상외로 빠르고 난폭하다. 감질나게 물 위로 빼꼼한 두 눈만 보이더라도 아주 멀찌기서 보거나, 행여 다가가더라도 그가 움직일라 치면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야 했다.


- 워터팍(waterbuck)! 최초로 우리가 쓰는 변기를 사용한 동물이라 자국이 남은 거예요. 보이죠? 


아니나 다를까, 강가 초원에 사는 영양류인 워터팍은 동그랗고 하얀 변기 시트 모양이 새겨진 엉덩이를 하고 있다. 사진 찍으라는 듯 몇 녀석이 모여 엉덩이를 모으기까지 한다. 백전백승 화장실 개그에 아이들은 키득키득하며 폴라로이드에 그 모습을 담기에 여념이 없다.

초베 강가에 사는 영양 워터팍(Waterbuck), 엉덩이에 선명한 양변기 시트 자국!

강에서 나와, 다시 지프로 사바나를 헤매기 시작했다. 초베 국립공원으로 난 길 한쪽은 제법 나무가 우거진 비탈, 다른 한쪽은 먼 지평선이 이어지는 습지와 평원이다. 초베의 동물들은, 아프리카의 다른 국립공원들에 비해 훨씬 가까이 있었다. 어쩌면 초베의 주민들에게, 가끔 출몰하는 이 지프는 크고 작은 굴곡을 천천히 꿀렁대며 지나다, 한참을 멈춰 있기도 하고, 다시 우르르릉 소리 내며 달리기도 하는 한 종의 동물처럼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임팔라도, 코끼리도, 기린도 우리를 잠시 무심히 바라볼 뿐, 경계하거나 제 할 일 제 갈 길을 멈추지 않는다.


- 잠깐 쉴까요? 멀리 수풀 뒤에 가서 볼 일을 보고 오세요. 


얼마나 되었을까, 멀리 셀 수도 없는 임팔라 떼가 풀을 뜯는 초원 근처에 지프를 세우고 지카가 말했다. 아주 정확한 타이밍이군. 나는 열두 살 한 명, 열 살 두 명인 나의 어린 동행들에게 넌지시 말했다.


- 니네 그거 알아? 나무는 옛날에도 초원에 오면 항상 똥이 마려웠어. 지금도 초원이 날 부른다.  

- 으에에에에에?

- 세렝게티에도 에토샤에도 나무 똥이 있어. 니네도 나랑 똥 싸러 갈래?


도리질을 하는 아이들과 영역 표시하냐는 친구들의 말을 뒤로 하고, 풀밭을 걸어 어느 덤불 뒤로 들어갔다. 내가 사파리에서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지프에서 내릴 수 없는 여행객이, 합법적으로 초원을 걸을 수 있는 드문 기회. 임팔라 똥 얼룩말 똥 옆에 내 똥을 남기는 데서 오는, 이 사바나에서는 저들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묘한 동질감. 평생 어두운 데 갇힌 엉덩이를 이 바람과 햇빛에 해방시키는 시원함. 너희도 언젠가 이 기쁨을 알게 되기를.


어느덧 해가 길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거칠 것이 없는 사바나에선 태양도 하늘에 아주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넘어간다. 하늘이 이렇게 넓고 높고, 깊기까지 했던가. 다른 시간을 열듯 끊임없이 달라지는 눈 앞의 빛에, 종일 사파리로 집중력을 잃었던 아이들도 낮은 탄성을 지른다.

사바나를 달리다보면 시나브로 알게 된다. 동물을 발견하는 기쁨은 이 여행(safari)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 큰 세계에 들어와 있음이 축복임을. 끝없는 지평선, 광활한 궁창처럼 열린 하늘, 층층이 놓인 가지각색 구름, 자비 없는 태양과 자비로운 바람, 단 한 그루 형형히 살아 있는, 혹은 완전히 죽었으나 여전한 위용으로 서서 새들에 자리를 내 주는 사바나의 나무들, 융단처럼 초원에 끝없이 흩뿌려진 노란 들꽃들…그러다 제 모습 그대로 생생히 살아가는 동물들과 조우하면 알게 된다. 나도 여기에 있구나. 나도 이 세계의 일부구나. 좋다. 정말 좋다.  


그때였다. 덜컹, 하고 지프가 서더니 거칠게 후진을 하고 다시 멈춰 섰다. 쉿! 하는 지카의 모습이 무언가 찾아냈다는 신호임을 이제는 아는 일행 사이에 긴장과 기대가 감돌았다. 사자다! 유능한 우리 지카가, 첫날의 마지막을 사자로 마무리한다. 그는 급히 무선으로 공원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파리 지프들에게 좌표를 알렸다. 다른 지프들이 달려오는 사이, 우리는 가장 먼저 여유롭게 암사자 두마리의 휴식을 지켜보았다. 하품마저도 귀여운 아직 어린 사자들이다.


- 사자로 끓인 국은?

- 동물의 왕국!

- 심바 여자친구 이름이 뭐였더라?

- 에일리? 날라? 닐라? 


빅 5 (Big 5; 버펄로, 코끼리, 사자, 표범, 코뿔소)의 최고를 첫날부터 만난 아이들은 신이 났다. 안 그래도 초베에 들어오니 라이언킹의 장면이 계속 생각난다던 녀석들이었다.


- 아~~~~~~즈뱅야~~~~~


캠프사이트로 향하는 길이었다. 노을로 가득찬 지프에서 멀어지는 평원을 바라보던 나옹이 갑자기 벅찬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주 적확한 타이밍과 그 구성진 가락에 모두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지카마저도 웃는다. 나는, 웃음 끝에 설핏 눈물이 난다. 아이들도 아름다움을 안다. 아이들의 방식대로 이 시간과 공간을 흠뻑 흡수하고 있다. 사바나가 아이들의 표정을 벌써 바꾸었다.


종일 우리와 초원을 헤맨 우리 지프의 시동이 꺼졌다. 명치 저 깊은 데서, 먼지 쌓인 전구 하나가 반짝하고 켜지는 느낌이다. 꼭 십 년 만이다. 탄자니아 세렝게티, 짐바브웨 마토포스, 나미비아 에토샤.. 매번, 사바나는 우리에게 예상 못한 깊은 경외와 평화를 안겨주었다. 


다시 왔구나, 이 먼 곳에. 

돌아왔구나, 내 속 깊은 곳에 살아 있던 이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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