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Jan 17. 2023

이토록 큰 세계에 나도 있음에

보츠와나 초베 국립공원 3/3 : 엄연하고 동등한 아름다움

한밤 굉음에 눈을 번쩍 떴다. 천둥인 것도 같고 지진인 것도 같은 소리. 휴대폰을 보니 새벽 세 시, 찬 바람이 들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잠든 아이의 이불을 돋우어 주고, 밖에 나가 텐트 사방의 겉덮개들을 내리고 들어온 후에도 스스스 공기를 뒤흔드는 기묘한 울림이 한동안 이어졌다. 곤두서는 귓바퀴를 꾹꾹 누르며 까무룩 다시 잠이 들려는 찰나, 가까이서 또렷하게 코끼리가 운다. 옛날에 우리 아이스박스 뒤지던 자칼은 만났어도 코끼리는 음식에 관심 없는데... 인간이나 그런 짓하지 코끼리가 지나가다 괜히 텐트를 밟는 일은 없지……


- 잘 잤어요? 밤에 사자 소리 들었어요? 근처에 사자가 있어요.

- 에? 설마요.

- 진짜라구. 그것도 큰 수컷 사자예요.

- 에이 농담이시죠?


이른 아침, 기다렸다는 듯 유르크 할아버지 하시는 말씀이 쉬이 믿어지지 않는다. 장난꾸러기 유르크는 첫날에도 "얘들아 사자 올라, 화장실 갈 땐 꼭 엄마랑 가라" 하고 아이들을 겁주셨었다.


- 오피, 밤에 여기 사자가 있었어요?

- 사자.... 지금도 있죠. 저 그르렁거리는 소리 들려요? 수사자에요.

- 진짜? 사자? 이 근처에?

- 네, 새벽 세 시쯤 수컷들이 서로 부르더라구요.

- 코끼리 소리는 확실히 들었어요.

- 네, 서로 경고한 거예요. 혹시 몰라 지카랑 모닥불을 크게 피우고 여기서 잤어요.  


그 소리가 사자였다니… 중얼대며 밀크티에 물을 붓는 내 앞에, 이미 나갈 채비를 다 한 지카가 나타났다.


- 짐은 다 실었어요? 진짜 수사자 보고 싶다고 했죠? 먹을 거 들고 차에 타요, 지금 출발해야 해요. 녀석이 사라지기 전에요.


어정쩡 스텐 머그를 든 채 지프로 향했다. 유르크 할아버지 일행이 작별 인사를 청하신다. 한 분 한 분 꼭 안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감사했습니다. 평안하세요. 안녕히 돌아가세요. 유르크를 제외하곤 통성명을 하지도 연락처를 주고받지도 않았지만, 사흘 스친 인연만큼 충만하고 충분하니 이 또한 사바나답다.


지프가 캠핑사이트를 벗어나자마자 쿠당, 웅덩이를 밟자 캠핑 머그가 울컥, 밀크티를 사방에 토해낸다. 젠장 이건 왜 들고 타서.... 바람막이에 방울방울 흐르는 밀크티를 털어내는데, 벌써 지카가 속도를 줄였다. 보이죠? 하고 가리킨 바닥에, 무딘 나도 알 수 있는 사자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긴장과 설렘이 확 올라간다. 새삼 신비롭다. 가이드들은 애니마구스도 아닌데 어떻게 동물들이 어딨 는지 알까. 아주 작은 흔적들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읽어낼까. 그중에서도 지카는 감이 좋은 사람이라, 함께 다니는 동안 온 초베가 그의 무전을 기다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우릉, 덜컹, 우릉, 덜컹,

천천히 움직이던 지프가, 초원으로 나가는 모퉁이를 돌았다.


- 쉬잇..


모두가 숨을 죽였다. 지프의 시동도 꺼졌다. 아직 해가 비스듬한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초원 한가운데, 커다란 수사자가 홀로 앉아있다.


- 일어나지 마세요. 소리도 내지 마요. 


지카가 나직이 일렀다. 운이 좋네요, 하며 그도 휴대폰 카메라를 켰다. 우리를 응시하던 사자가 스윽 일어나 터벅, 터벅, 걸어왔다. 그리고,


새벽 세 시의 그 소리가

내 눈앞에 울렸다.


아침에 유르크 할아버지가 사자예요 하셨을 때도, 영화에서 다큐에서 사자 한두 번 본 게 아닌데 아무리 그 소리를 못 알아들을까 싶었다. 그러나 지금 울리는 이 소리는 이전엔 들어본 적이 없다. 깊은 땅을 흔드는 단단하고 낮은 울림. 사방의 풀들을 다 뉘이는 거침없는 파동. 귀가 쫑긋한 임팔라의 심장을 파고들듯한 날카로운 소리 끝. 천둥 같기도 하고 지진 같기도 했던, 새벽의 그 소리.


네 발로 땅을 쥐고 서서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에, 두근, 심장 소리가 커지고 뒷목이 서늘해졌다. 동물의 왕답다. 집채만 하다는 나니아의 아슬란을 만나면 누구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겠구나. 매일 만난 암사자나 솜털이 보송한 소년 사자는 물론, 덩치로는 비교가 안 되는 코끼리나 버펄로에게서도 이런 위엄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자가 포효를 멈췄다. 이 지프가 성가셔도 위협은 아닌 것 같았는지, 우리에게서 시선을 거둔 그가 천천히 길을 건넜다. 우리도 시동을 걸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지프라고는 아직 우리뿐이다.


- 멋지다..... 정말 멋지다.


마침내 사자가 건너편 수풀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일행이 깊은숨을 내쉬며 감탄을 연발했다. 진짜 사자였어! 다 큰 심바야 아님 심바 아빠야? 아이들도 말문이 터졌다. See? 하고 지카도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 그럼 이제 사냥하는 장면을... 하자 그가 크게 웃는다. 그 옛날 세렝게티의 가이드는 말했었다. 진짜 눈앞에서처럼 사냥하는 모습을 보는 방법이 있어요. 뭔데요? 디스커버리 채널을 봐요.





새벽 드라이브를 마치고 돌아오니, 야전 의자 여섯 개와 모닥불 자국 외에 흔적도 없이 치워진 캠프사이트가 이제 떠날 시간임을 말해준다. 제이콥의 마지막 브런치를 든든히 먹고 사바나를 벗어나는 마지막 게임 드라이브에 나섰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 앞에 지프 몇 대가 어정쩡 서 있는 게 보인다. 길 양 쪽으로 코끼리 떼가 갑자기 몰려 짐승도 사람도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거였다. 초베에선 동물들이 아주 멀어 보이고 또 느릿느릿 움직이는 듯한데도 어느새 곁을 지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노련한 지카가 코끼리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조심조심 길을 열었다. 마음만 먹으면 코끼리가 지프 안의 나옹을 감아올릴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다. 길이 트이고 나니 코끼리들도 한숨을 돌렸는지, 성체 두 마리 사이에 선 새끼 코끼리 한 마리가 우리를 향해 발을 구르고 빼애애애액 소리를 질렀다. 쳐든 코와 세모로 열리는 아랫입술이 말할 수 없이 귀엽다.


오구오구 기특해. 화났어? 애기 화났쪄요? 하는 나를, 우리 아이들이 마치 저희가 놀림받은 듯 쉬잇! 쉬이이잇! 하고 나무랐다. 그러자 성체 코끼리가, 잔뜩 성이 난 제 편의 아이를 어르듯 코를 둥글게 내린다. 이럴 때의 코끼리는 꼭 품위 있는 중년의 여인 같다. 코끼리가 사람보다 지혜롭다는 말을 들어 그런 걸까, 막 태어난 듯한 새끼부터 22개월 임신 중 어디쯤일까 싶은 만삭의 코끼리, 매머드 같이 거대한 코끼리가 서로 주고받는 몸짓은 가끔, 목소리가 들리듯 의미가 짐작됐다.

평생 볼 코끼리를 다 봤다더라 하는 말이 과하지 않게, 초베엔 정말이지 코끼리가 많았다. 앞발로 질긴 풀을 살살 뜯어 코로 감아올리는 모습, 제법 높은 나무의 잎을 절묘히 훑는 모습, 코로 진흙을 몸에 문질러 목욕하는 모습, 강가에서 물을 마시다 에라 하고 풍덩 뛰어들어 수영하는 모습을 찬찬히 오래오래 보았다. 새끼들을 품다시피 한가운데 두고 함께 다니는 코끼리 무리는 꼭 아이를 함께 키우는 부족처럼 보인다.


빠져나온 길 왼쪽의 초원으로부터 끊임없이 코끼리가 올라왔다. 천천히 초베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따라 또한 버펄로가, 기린이, 임팔라가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마치 우리를 배웅하러들 나오는 것 같다. 옛날 에토샤에서 나오던 날에도, 비가 오는 길 한가운데 두 마리 기린이 서서 우리를 끝까지 지켜보는 바람에 나는 그만 엉엉 울었었다.


- 얘들아, 반가웠어! 잘들 살아 있어. 사자한테 잡아먹히지 말고, 잘 도망가야 돼. 알았지?


이번에도 나는 임팔라 떼에 인사하며 눈물 콧물이 터지고 말았다. 한 줄로 길을 건너는 새끼 임팔라들과, 무리를 엄호하며 맨 마지막까지 경계를 풀지 않는 우두머리 임팔라. 또, 수컷 암컷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뽈록한 배를 하고 순하게 풀을 뜯는 얼룩말들. 새들을 목에 매달고 우아하게 홀로 또 같이 걷고 또 걷는 기린들.


평화로워서,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서, 지키고 싶어서, 고마워서, 벌써 그리워서.. 손등으로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난다. 그리고 지평선을 따라 사흘 내내 펼쳐진 제각각 엄연하고 대등한 삶의 풍경이, 너의 삶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해준다.


아직도 내가, 내게 없는 걸 가진 사람들이 부러워 쓰라리구나. 내가 선택한 삶이, 내게 주어진 것들이 고맙고 소중한 걸 잊는구나. 또다시 쓸모없다는 위축감, 아무것도 안 한다는 냉소, 뒤처진다는 조바심에 나를 빼앗기고 있었구나.


오로지 인간들만이 곁눈질하다 병에 걸린다. 나에 의해 ‘나’의 우리에 갇힌 내가, 동물원 밖 관중 같은 나에 의해 내상을 입은 비대한 내가, 끝없이 높고 넓은 초베의 주민들 덕에 제 크기 제 자리를 찾는다. 봐. 너도 이 곳의 일부야. 사바나에 어디 쉽기만 한 삶이 있디? 매력적이지 않은 삶이 있디?


그리 애틋한 초식동물들도

포식자 독수리도 사자도 악어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무대포 하마도

코끼리똥을 굴리다 제가 굴러도 즐거운 쇠똥구리마저도

희로애락애오욕은 각자각자.


그러니 담백하게 너의 삶을 살아.




- 깜짝이야, 저거 코끼린 줄 알았다. 


고작 사흘이어도 매일 여덟 시간 열 시간 사바나를 헤매고 나오면 후유증이 있다. 길가의 전봇대가 기린으로 보이고 농장 담벼락 안에 쌓인 건초더미가 코끼리로 보인다. 초베 입구의 아주 작은 여행자 도시 카자네(Kasane)가 호화 문명 같다. 덜컹이지 않는 시커먼 도로가 어색하고,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길 잃은 기분도 든다.


국경 부근, 강줄기를 따라 보츠와나, 잠비아, 짐바브웨, 나미비아까지 네 나라가 만나는 지점을 다시 지난다. 들어올 땐 한 번에 네 나라를 여행하는 진기한 순간이란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오는 길엔 사람이 그은 저 경계가 초베의 주민들에겐 아무 힘이 없지 싶어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동물들이 제 무리대로 비슷하듯, 돌아가는 인간의 일행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땀과 피로에 절은 얼굴.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 지저분한 매무새. 그러나 사바나에 푹 잠긴 얼굴. 깊이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표정.


- 기분이 이상하다? 수련회 갔다 온 거랑 비슷해.

- 초원에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정화되는 게 있더라.


마침 친구의 생일이라, 아이들은 방에 - 사파리 완주 기념 컵라면과 아이패드와 - 남겨두고, 친구 부부와 저녁식사를 했다. 사바나에 있는 동안 서로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말 없이도 마음의 일렁임이 비슷함을 확인한다.


잠비아 도착한 날, 박스에 긁혔는지 반기는 강아지를 안다 그랬는지 오른팔 안쪽에 긴 상처가 났다. 쓰라리고 성가신데 닷새가 지나도 붉은 핏자국이 선명해, 나이 먹으니 이 정도 스크래치도 이리 오래가는구나 했었다. 그런데 사바나에서의 둘째 날, 우연히 팔뚝을 보니 희미한 흔적만 있었다. 뭐지? 하고 팔을 이리저리 돌려볼 만큼 갑작스런 변화였다. 믿거나 말거나, 사바나는 그런 곳이다. 망가진 어딘가가 시나브로 낫는 곳.


그러므로 누구든,

사는 동안 한 번쯤은.



이전 04화 아무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는 곳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