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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Jan 24. 2023

여행 중에도 쉼이 필요해

시아봉가(Siavonga)의 추억: 빈 방 있습니까?!

잠비아 남쪽 끝의 리빙스턴에서 북동쪽 시아봉가로 이동했다. 차로 여덟 시간을 달리는 동안 지평선이 능선으로 바뀌고, 바오밥 나무가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산길이 나타났다.  정오 전에 리빙스턴을 떠났는데 캄캄한 저녁, 8시를 넘기고야 시아봉가(Siavonga)에 닿았다. 도착한 날은 잠만 자게 되니 검박한 숙소에서 묵자던 친구 제안이 다시 이해가 된다.


- 취소하셨죠? 그런데.. 다시 예약한 기록은 없네요.


숙소 체크인 중 내 차례에서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예약 기록을 못 받아 방 배정을 하지 않았단다. 실수려니 하고 예약이 확정된 메일을 다시 보여 주자, 리셉셔니스트가 사뭇 방어적으로 나온다.


- 확정된 예약은 우린 몰라요. 당신은 취소만 했어요. 그리고 지금 방이 하나도 없어요.

- 여길 봐요. 취소와 이건 일련 번호가 다르잖아요. 그리고, 방이 아예 없다구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통화였다. 매니저에게 상황을 보고했고, 주변 여러 숙소에 전화를 했으나, 방이 없다. 잠비아에선 연봉의 20% 이상을 연말 보너스로 주게 되어 있어 사람들이 과감히 연말 휴가를 즐긴다는 친구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실랑이가 이어졌다. 차로 20분 떨어진 다른 숙소를 하나 찾았으니 돈을 더 내고 그리로 가란다.


- 저기, 예약을 제대로 완료하고 값을 내는 건 내 책임, 방을 준비하는 건 너희 책임이야. 차액은 너희들이 내.


그러자 손사래를 치며 대꾸한다.


- 싫으면 너와 네 아이는 오늘 잘 곳이 없어. 선택은 네 몫이야. 예약을 어찌했건 우린 받은 정보가 없어.


예상 밖 우군은 예약 사이트였다. 전 세계가 크리스마스 당일인 시간에 연결이나 될까 싶었는데, 즉각 연결된 에이전트는 채팅 상담으로 실시간 상황을 파악하고 예약에 문제가 없다는 여러 가지 증빙을 주다 못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숙소가 전화를 안 받는다며 내 전화로 옆의 직원 연결을 부탁했다.


그러나 숙소 직원들은 끝내 통화를 거부했다. 너희와 예약사이트 사이의 오류이니 너희끼리 해결해라 설득해도, 사이트에선 너희와 얘기를 하겠다지 않냐 화를 내도 요지부동이었다. 상사를 연결하라 해도 막무가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다.


불통의 상황을 다시 이해한 상담원은 금액 상관없이 자신들이 대안을 찾겠다고 근방의 숙소를 모두 스캔했다. 그리곤 제휴되어 있는 모든 숙소가 만실인데 40분 떨어진 거리의 호텔 하나가 잡힌다며 아이를 데리고 이동이 가능하겠냐고 미안해했다.


결국 친구 방에 엑스트라베드를 설치하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되었다. 가로등도 시원치 않은 한밤중 산길을 오래 움직일 수는 없었다. 다행히 방은 아주 커서, 킹베드 세 개를 설치하고도 넉넉했다. 또 다행히, 모두가 한 방에서 자는 상황이 우리끼리 크게 불편하지 않다. 공동육아 중 들살이 가면 한 방에 애들 데리고 스무 명씩도 잤던 날들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 크리스마스에 빈 방이 없었다는 클리셰라니... 메리 크리스마스!


간밤의 얘기를 들은 남편이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성모마리안 줄 아냐고 할 뻔했어.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낄낄 웃다보니 전날의 푸닥거리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안 그래도 새벽에 일어나 혼자 산책하며, 먼 데 닭소리, 물 위의 통통배 소리가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에 어젯밤 일을 머쓱하던 참이었다. 늦은 밤 도착한 여행지는 간혹 아침에 이렇게 표정을 달리하기도 한다. 환불받은 돈으로 같이 고생한 친구네와 점심을 잘 먹는 걸로 해프닝을 마무리해야지. 메리 크리스마스.


수도 루사카에서 서너 시간 거리인 시아봉가는 현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휴양지란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 호수라는 카리바 호수는, 파도가 없다는 점을 깨닫기 전까진 정말 바다처럼 보인다. 내륙국가인 잠비아 사람들이 ‘다른 세상에 오는 느낌’으로 찾는 곳이라는 친구 말이 이해되는 풍경이다.  낮엔 관광객들을 태운 배가 조용히 물 위를 오가고, 밤에는 이곳의 민물 생선인 브림(bream)과 카펜타(kapenta)를 잡는 통통배들이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곳.


여행 중에도 쉼이 필요하다. 지나온 시간들을 담고, 추스르고, 정비하는 시간. 무언가를 소화하는 게 빠르지 않은 나는 여행 중 더 자주 쉼표를 찍어야 한다. 그렇게 쉬기에 시아봉가는 아주 적절한 곳이라고 J 부부는 말했었다.


덕분에 사흘을 이곳에서 잘 쉬었다.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智者樂水)라지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겐 역시 산도 필요하고 물도 필요한 법. 아침저녁으로 물을 보고, 물 위로 뜨고 지는 해를 보니 평야에서와는 또 다른 평화가 마음에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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