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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Feb 02. 2023

변하지 않은 듯 보일지라도

루사카(Lusaka) : 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 잠비아 왔다 간 지 10년 됐다고 했니? 그때랑 크게 달라진 게 없을 것이다. ㅎㅎ


도착한 첫날, 공항으로 마중 나온 J가 말했었다. 보름간 지낸 아프리카는 언뜻 그런 것도 같다. 이곳 특유의 붉은 흙과 거침없는 햇빛과 우거진 나무들은 물론이고, 원색의 유심 가게들과 여전히 코카콜라 컬러가 압도적인 노점상들도 변함이 없다. 도심을 벗어난 길가의 큰 나무 아래는 어김없이 작은 좌판에 무언가를 파는 사람들이 있다. 손으로 쓴 주점 간판 ‘bites n pints’부터 대형 마트 ’pick n pay‘ 까지 여지없는 라임(rhyme)과, ’blessed shop’ ‘god answers’처럼 축복을 바라고 비는 동네 가게의 이름들도 반갑다. 이번 여행 중 리빙스턴에서 들른 몰은 11년 전 사진과 입구 모습과 간판까지 그대로였다.

여전하고 강렬한 아름다움이 반가운 한편, 이곳의 사람들이 전보단 덜 가난하고 덜 고통스러웠으면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러나 그저 바람일 뿐, 잠깐 지나는 여행으로 무엇을 알기는 어렵다. 한 비영리단체 잠비아의 리더로 일하고 있는 J와의 이야기에 기대어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려니 짐작하지만, 그 역시 바람에 가깝다.


마지막 날, 아이들과 응곰비(Ngombi) 마을에 다녀왔다. 루사카의 가장 큰 빈민촌 중 하나라는 이곳 학교에 한국의 물건들을 전하기 위해서다.  떠나오기 전 한국의 사무실 리노베이션이 시작되었고, 주변의 동료들에게 새로운 사무실에서 사용하지 않을 사무용품들을 모아 달라 해 이고 지고 온 참이었다. 잠비아에서의 날들 대부분을 함께 여행하며 보낸지라 일정이 여의치 않았지만, 가져온 물건의 일부라도 나옹이 직접 드리게 하자는 J의 배려였다.


잘 닦인 시내 도로에서 길을 틀자 전혀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여기저기 푹 패인 비포장도로 양 쪽으로 숯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의 긴 행렬을 지나, 망고 몇 개를 1콰차(70원)에 파는 점방들이 드문드문 박혀 있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을 사람이 걷는 속도로 지나자면, 이 낯선 차창에 코가 닿을 만큼 가까이 선 어른들의 경계심과 아이들의 호기심이 그대로 전해진다.


<희망의 주춧돌(Cornerstone of Hope)>이라 적힌 담벼락의 녹슨 철문을 밀고 들어갔다. 마당을 두고 여러 개의 방이 둘러진 작은 단층 건물이 이 마을의 초등학교다. 사무용품 한 박스와 마트에 들러 실어 온 옥수수 가루 두 포대, 식용유 한 통, 설탕 한 포대를 내려놓았다. 방학이라 아이들이 없어 휑한 교실들이 어수선했지만, 평소엔 종일 아이들이 배우고 먹는 공간이라며 한 곳 한 곳 설명하는 교사 얼굴에 어린 자부심이 보기 좋았다.


그녀 역시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고 들었다. 생활과 배움에 필요한 물건들, 어른들의 돌봄과 보호, 모든 것이 결핍된 환경에서 자랐지만 좋은 선생님이 되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어렸던 자신처럼 여전히 학교에 오는 것조차 당연하지 않은 아이들을, 또 여전히 부족한 물자와 지지 속에서 끊임없이 감당하는 것은, 어쩌면 거듭 상처가 덧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돕고자 상담심리사인 J의 아내가 정기적으로 그녀를 만나고 있다 했다.


학교에 머문 짧은 시간, 동네 아이들은 내내 학교 문 밖에 우르르 몰려 서서 외국인들을 구경한다. 그리고 우리가 학교를 나서기 무섭게, 몇 아이가 차 앞으로 달려와 손을 내밀었다.


- 돈을 주세요. 배가 고파요. 돈을 주세요.


아이들에게 작은 돈을 건네고,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차 문을 닫았다. 이미 잠비아에 있는 동안 여러 번 겪은 일이었다. 신호에 걸려 서 있는 동안 갓난아이를 차창으로 쓱 내미는 여인의 모습에 혼비백산하기도 했고, 비포장도로 저 앞의 웅덩이에 흙을 마구 쓸고 달려와 길을 고르게 했으니 돈을 달라 차창을 두드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은 똑같이 귀하지만, 달리 길러지리라. 아직도 나는 이 세상의 그 유격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나옹이 태어난 9년 전은, 아직 긴 여행의 기운이 우리에게 짙게 배어 있을 때였다.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에 행복한 한 편, 여행 중 시간을 함께 보낸 여러 곳의 아이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큰돈이 드는 산후조리원에 가지 않고, 출산 준비물도 새것으로 마련하지 않았다. 백일떡 대신 해외에 돈을 보냈고, 돌도 조용히 지나가려는 걸 주변에서 만류해 가족들과 식사는 하고 지나갈 정도였다. 아이가 한참 클 때까지, 물려받고 선물 받은 것만으로도 어려운 나라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이 입고 쓰는데 더하진 말자며 아이 옷과 물건 사기를 극도로 자제했다.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아프게 인정했다. 그런 결벽이 다른 이를 더 사랑하거나 돕는 동력이 되어 주진 못했고, 아이가 누릴 수 있는 걸 빼앗듯 한다 해서 세상이 더 공평해지진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강박이, 무엇보다 나 자신의 부채감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했다는 것을. 인간으로서, 여기저기 덜그럭거리는 이 세상의 유격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 아직도 여긴 "내일 시험이니 집에서 종이 가져와라” 하는 곳들이 많아. 시골 현장에 가면 더해.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여러 생각이 들지. 내 삶과 현장의 간격이 너무 커서 아찔할 정도야. 아직도 내가 그걸 다 소화하지는 못하는 거 같아. 더 낮게 살아야 하는데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것 또한 내 한계야.  


어렴풋이 J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사무실에서 서류에 사인하고 직원들만 관리해도 될 것 같지만 그는 매주 몇 차례씩 멀고 가까운 현장에 다닌다. 그리하여 물자만 배분하던 것을 지역 화폐로 바꾸는 의미 있는 변화도 만들어낸 것이겠지만, 그렇게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간격도 더, 한계도 더 선명히 느껴질지도 모른다. 사서 하는 마음고생도 깊으리라.


이십 대엔, 누군가 만들어낸 변화에 몹시 가슴이 뛰었다. 삼십 대엔, 변화를 위해 일하는 어떤 이들의 엄격한 삶의 방식과 태도를 본받고 싶었다. 사십 대가 되니, 그렇게 살다가 흔들리고 번민하는 이들에게 마음이 포개진다. 삶도 세상도, 어릴 적 우리의 상상보다 몇 곱절 복잡하다.


- 오빠, 너무 잘하고 있어. 안팎으로 정말 더 할 수 없이 잘하고 있다. 야, 어떻게 더 잘하냐?  


그리고, 코너스톤 학교 바깥 담벼락에 누군가 써 놓은 글귀를 기억한다.


Do not end up as an observer but aim at solving and becoming a creator of a new society

우리의 최선은, 속 시끄러움을 꺼버리려 결국 방관자로만 이 삶을 끝내지 않는 것이다. 이 문제를 푸느라 또 다른 문제가 생기겠지 하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지지 않고 애쓰는 사람들을 마음을 다 해 응원하는 것. 차마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있노라고까지는 말하지 못해도, 그대로인 듯 보이는 세상이 조금씩, 더디게나마 움직이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


- 고래(*아이들이 부르는 J의 공동육아 시절 별명), 여기 그럼 교실 네 개 다음엔 뭘 지을 거야?

- 교실 다음에.. 과학실? 누군가 또 기부해 주신다면?  

- 음악실도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면.. 급식실? 체육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코너스톤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을 위해 짓는 중인 학교 터에 들렀다. 한국의 한 할머니 독지가의 후원으로 중학교가 지어지고 있다. 걸어서 족히 한 시간은 걸릴 먼 거리지만, 아이들은 학교가 다 지어지기만을 기다린다고 했다. 한국의 초등학교와 잠비아의 국제학교에 다니는 어린이 둘은 학교를 간절히 기다리는 심정을 이해하진 못해도, 제법 진지하게 수돗가 터와 올라가기 시작한 학교 벽을 본다. 그리고 벽돌 위를 상상하며 학교를 짓고 있다.


그렇게 벽돌 하나, 교실 하나가 올라가는 만큼 누군가의 삶이 달라진다. 모쪼록 너희들의 학교가, 너희들의 삶이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면 그걸로 족하다. 꼭 아홉살 만큼의 깜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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