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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Jan 08. 2023

아무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는 곳

보츠와나 초베 국립공원 2/3 : 부시(Bush) 캠핑의 기억

종일 달린 우리 지프가 <BOGA site no. 4>라는 팻말이 붙은 나무 앞에 섰다. 키 큰 나무 여럿이 서로 둥글게 몸을 기울여 숲의 일부를 둥지처럼 아늑하게 숨긴 곳이었다. 이런 장소는 누가 처음에 찾았을까?

사이트 매니저 엠피(MP), 요리사 제이콥(Jacob), 그리고 먼저 도착한 다른 한 팀의 가이드 오피(OP)가 우리를  맞는다. 사이트 매니저와 요리사는 일행이 게임드라이브를 하는 동안 먼저 와 사이트를 구축하고,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우리 사이트엔 널찍한 반원 대열로 총 7개의 2인 1조 텐트가 자리했다. 그 앞엔 다시 반원 대열로 야전 의자 열 몇 개가 정렬되어 있고, 한가운데엔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고 있었다. 텐트로 이루어진 반원 바깥 오른쪽엔 물과 장비를 실은 차와 간이 부엌과 스탭들의 텐트가, 왼쪽엔 멀리 두 칸의 간이화장실과 샤워실이 있다.


천재 쉐프 제이콥은 숲의 마른 장작들로 땐 불과 무쇠솥으로 훌륭한 스튜, 샐러드, 야채 볶음, 고기 요리를 선보였다. 약간의 과일과 스낵에 와인, 주스, 커피, 차까지, 별빛 아래 모닥불 앞에서의 완벽한 만찬이었다. 다만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별빛과 모닥불’이 빛의 전부라는 점이었다. 서빙테이블을 비추려고 유일하게 매단 태양열 전등은 원래도 조도가 낮은데, 그마저도 나무 둥치에 가려 제 몫을 못하고 벌레만 모으고 있었다. 팀 전체가 쓰는 휴대용 발전기는 하나 있겠거니, 텐트 별로 랜턴은 하나씩 있겠거니 했던 막연한 예상은 어디서 왔을까?


이 긴 밤을 어쩐다지.… 아직은 아이들이 어리니 인근의 여행자 도시에서 자고 공원에 드나드는 선택지도 있었으나, 숲에서의 사흘 사파리를 기꺼이 수락해 준 친구 부부에게 미안해진다. 늘 스위스아미나이프와 랜턴을 챙기는 남편의 빈 자리도 느껴진다. 새벽부터 국경 넘은 열 네시간 강행군의 피로도 새삼 몰려온다. 여행 중엔 이처럼 사소한 계기로 마음의 빛이 사라지기도 한다. 


- 어떻게 헤드라이트 가져올 생각을 하셨어요, 저는 완전히 잊었어요.


커피를 마시며, 옆의 할머니께 푸념을 했다. 오늘 캠핑 멤버 중 단연 시선을 사로잡은 어르신 일행의 한 분이었다. 백발의 꼿꼿한 할아버지 한 분, 할머니 두 분의 조합만으로도 눈에 띄었는데, 어둠이 내리자 이 노인들은 노련하게 각자 이마에 장착한 헤드라이트로 예의 그 ‘사소한 조명 문제’를 해결하고 온전히 여유롭고 우아한 식사를 하셨었다.


- 원주민 마을에 가면 이보다 더 아무것도 없이 지내야 하는 일도 많으니까 항상 들고 다녀요. 내가 헤드라이트 두 개 갖고 있어요. 하나 빌려줄게요.

- 오, 아닙니다. 지카가 휴대용 랜턴을 하나 빌려주었어요.

- 그래도 더 필요할 거예요, 사양 말고 가지고 있어요. 아이가 밤에 화장실에라도 가려면 이게 필요하죠.


할머니는 손사래치며 사양하는 내 손에 굳이 헤드라이트를 쥐어주셨다. 옆의 할아버지도, 나도 큰 게 하나 더 있으니까 필요하면 얘기해요! 하고 거드신다. 사양은 했지만 막상 지카의 랜턴을 친구에게 주고 내 손에도 빛이 하나 생기자, 마음이 환해진다. 이 작은 빛의 동그라미가 주는 안도감, 그리고 어른들의 다정함이 주는 따뜻함.


스위스에서 오신 유르크 할아버지와 아내분, 그리고 오랜 친구까지 세 분인 이 팀은 아프리카와의 인연이 오래되었고, 수차례의 파견과 봉사활동이 끝나고도 이 곳에서 사귄 친구들을 만나러 여행을 오시곤 한단다. 친구 J 부부는 루사카에 살고, 나는 잠비아에 두 번째 왔다 하니 몹시 반가워하셨다. 손주들이 우리 아이들 또래라 하시더니, 영어도 못하고 숫기도 없어 건드리면 또르르 오그라드는 나옹에게 계속 말을 거시는 유르크는 영락없는 장난꾸러기 할아버지다.


- 그런데 사실, 굳이 화장실까지 갈 필요 뭐 있어요? 그냥 텐트에서 좀 떨어진 수풀에서 하면 돼. 난 항상 그래. 휴지만 안 버리면 되지. 안 그래요?


각자 잠자리로 흩어지는 시간, 할머니 내게 슬쩍 귀띔하신다. 아아 깨이신 분. 이 숲 속에서 할 일과 안 할 일을 정확히 아시는 그 말씀, 내 마음에 동그란 빛이 하나 더해진다. 역시 이건 인종과 국경을 초월해, 이 마더네이처에 들어오면 단전으로부터 깨달아지는 원초적 지혜로다.


                                                                  # # #


엠피가 돌아다니며 텐트 앞의 간이세면대에 따뜻한 물을 채우는 소리에 잠이 깼다. 어둑어둑한 사위에 곧 눈이 익숙해진다. 그리고 서서히 느껴진다. 이른 아침 숲의 냄새와 어제 타다 남은 모닥불 냄새. 새 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이 나무에 닿는 소리, 사람들의 조심스런 발소리. 순한 아침이다.


- 엄마, 텐트가 생각보다 너무 편했어..


어느새 깬 아이가 또르르 굴러와 품을 파고들었다. ‘하나님 정말 좋은 하루를 주셔서 고맙습니다’하고 잠들더니, 참말 행복하고 편안하게 깨어난 그 얼굴이 내 마음을 닦는다. 아이와의 여행에선 가끔, 내가 아이를 데려왔지만 아이가 나를 데리고 다니는구나 하는 순간이 온다. 늘 순간에 오롯이 있는 아이들은, 곧잘 다른 데로 발이 빠지고 마는 어른들을 잡아 와 붙드는 재주가 있다. 그런데 이번엔, 그런 재주가 있는 어르신도 계시다.


- 부시(Bush) 샤워 했어요? 얼마나 시원한데!  공짜로 즐기는 숲 속의 사치지!

- 그럼요, 잘하셨네요- 저는 오후 드라이브 직전에 하고 가려구요.

- I love this bushlife! 이렇게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아, 안 그래요?

- 저는 영원히는 아니고 한.. 일주일쯤요? ㅎㅎ 맞아요 두 밤은 너무 짧아요, 더 있고 싶어요.


무엇 하나 불편한 기색이 없는 유쾌한 유르크 할아버지. 천재 쉐프 제이콥의 거한 브런치와 함께 한나절의 쉬는 시간이 주어진 참이었다. 사바나의 동물들은 - 인간 포함! - 한낮의 태양을 피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작은 야전 부스에 높은 물주머니를 매단 저 샤워실의 훌륭함을 설파하곤 쉴 곳을 찾아 사라지셨다. 덕분에 나 뿐 아니라, 망설이던 친구들과 땀으로 쓰라려하면서도 한사코 싫다던 꼬맹이 한 녀석까지도 개운하게 샤워를 마쳤다.

집이자 쉘터이자 놀이터인 오픈 지프

텐트에서 한 숨 자고 나와, 지프에 가만히 앉아 바람을 쏘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바분 원숭이 같은 아이들은, 지프에 매달리고 뛰어내리고 깔깔대다, 다운받은 <용암 위를 건너라>에 빠졌다가, 땅을 파다, 불장난을 하느라 한 시도 쉬지 않는다. 이제 다시 게임드라이브 갈 시간이네? 하니 벌써?! 하는 귀여운 녀석들아, 벌써 네 시간이 흘렀단다....


아이들이 풍성하고 능숙하게 숲에서의 사흘을 만끽한 데는, 역시 뜻밖의 캠핑 메이트들이 큰 역할을 하셨다. 플립플랍 신고 독충에 쏘이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하면, 아니 간호사가 둘이나 있는데 살려주겠지! 하고 껄껄 웃으며, 숲의 불편을 대수롭잖게 넘기시는 모습은 아이들에게 은근한 영향을 끼쳤다. 그 뿐이랴, 아이들이 하얀 잿더미 사이로 연기만 남은 모닥불을 살려내면 엄지를 척 들어보이고, 수줍어하며 나무젓가락에 꽂아 건넨 마시멜로를 기꺼이 받아 함께 모닥불에 구워 먹으며 진심으로 즐거워하셨다.


- 멋진 분들을 만났다. 그치? 어떻게 저 연세에 이런 캠핑을 올 생각을 하셨을까.

- 그러게. 저 분들이라고 고혈압 당뇨가 없거나 허리 다리가 안 아프시진 않을 거 아니야.

- 우리 세대 정도엔 나이를 먹어도 저렇게 인생을 즐길 줄 알게 될까?

- 그럼 오빠, 그러자. 근데 오늘 잘 놀아야 내일도 잘 놀 수 있다. ㅎㅎ 갑자기 되는 건 없어.


여러 사람 덕분에 행복한 캠핑이었다.

이번에도 숲은 많은 것을 주었네.


이것이 진정한 스탠리!
천재 쉐프 제이콥의 빅 브런치
유르크 할아버지와 지카, 엠피, 제이콥, 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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