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버지를 그리다
이번 추석은 전에 없던 외가, 친가를 돌며 부모님과 로드 트립을 다녔다. 3박 4일을 이렇게 효심 가득히 보낼 수 있을까 스스로 뿌듯하게 자평한 연휴였으며, 나와 다르게 각자의 시간을 보낸 두 동생들은 참 똑똑하구나(!) 생각한 연휴였기도 하다.
엄마는 8월 초부터 자신의 연휴 계획을 내게 얘기했다. 돌아가신 자신의 엄마, 언니, 오빠들이 있는 자리를 가보고 추모하는 것. 고창, 전주, 임실 등 전라도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 자리를 돌려면 아빠로는 부족하고 운전을 같이 해줄 내가 필요하다고 하며 외삼촌집에서는 잘 곳이 없으니 숙소도 알아봐야 한다고 내게 할 일을 자연스럽게 건넸다. 엄마의 계획 덕에 나는 연휴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었고, 시간이 된다면 엄마와 같은 풍경을 보며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품었다.
연휴가 시작되고 나는 운전기사로써 임무를 시작했다. 울산에서 영광, 고창, 고창에서 군산, 전주, 임실, 남원 등 이번 연휴 동안 운전을 하루에 3,4시간씩 하며 엄마 홀로 하는 운전 노동을 덜어드렸다. 어릴 때는 아빠가 운전을 주로 맡았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몇 번 있은 후, 아빠의 손떨림과 한쪽 귀가 안 좋아지면서 운전대는 엄마가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엄마가 운전을 할 때 아빠가 옆에서 운전 관련 조언을 하는 통에 장거리 운전을 할 때마다 엄마는 아빠한테 쌓인 서운함이 종종 폭발하기도 하고 그 폭발의 여파는 종종 내게도 전해져 이번 연휴에는 내가 운전을 도와 그 폭발을 막았다.
엄마의 고향, 전북 고창에 도착해 외할머니 댁에 가기 전에 있는 엄마의 가장 큰 오빠의 묘를 들렀다. 2019년에 돌아가셨는데 엄마와는 배다른 형제시다. 외할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이 첫째 아들을 낳고 돌아가셨고 이어 맞이한 두 번째 부인이 바로 나의 외할머니셨다. 옛날에는 이런 일이 흔했고 내가 가진 선입견과 다르게 형제간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엄마는 이 오빠가 자기에게 참 다정히 잘해주셨다고 어린 시절 일화를 얘기하며 자신이 사 온 국화 모종을 묘 앞에 심었다. 나도 어릴 때 큰 외삼촌을 뵐 때마다 나와 내 동생들을 살뜰히 챙겨주신 모습이 기억난다. 천직이 시골 농부 셔서 고무신 신고 항상 논에 밭에 가서 일하시는 모습,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땡그란 눈이 기억난다. 장례식 때 나는 가지 못했는데 죄송하다고, 하늘에서도 고무신 신고 산책하며 지내시길 기도했다.
큰 외삼촌께 인사드리고 다음으로 외할머니 댁을 가 외할머니 묘를 뵈었다. 엄청난 산모기떼에 인간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그 와중에 엄마는 외할머니 산소에 술을 뿌리며 나의 결혼을 외할머니께 부탁하고 나는 엄마의 무릎을 먼저 낫게 해달라고 말씀드렸다. 외할머니가 저세상에서도 뭐부터 해야 할까 심히 고민에 빠지셨을 것 같다. 엄마가 준비한 두 번째 국화도 외할머니 산소에 안착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외할머니 댁은 외삼촌의 동물과 물건으로 아주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한옥을 정비하는 것이 인생을 바쳐야 되는 것임을 외삼촌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부디, 외삼촌 계획대로 은퇴 후 찬찬히 정비할 수 있기를 그때는 나도 꼭 일손을 보태고 싶다.
외할머니 댁을 나와 엄마의 사촌 댁을 방문하여 미리 주문한 말린 빨간 고추를 찾았다. 엄마는 본인 것 하나, 지인 것 하나 총 2개, 30근 가까이 주문을 하여 숙소에서 말린 고추에 묻은 먼지를 닦는 과업도 연휴 중 할 일로 추가해 놓은 것이다. 연중 내내 엄마 요리에 고춧가루는 빠질 수 없는 주요 양념인데 그 와중에 고추 농사짓는 가족 것으로 사고 싶었다며 자신의 소비에 뿌듯함을 가지고 말하였다. 엄마의 그 가치 소비 덕분에 연휴 내내 숙소와 차에는 고추 냄새가 방향제처럼 났다.
첫날 할 일을 다 마치고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푼 후 나는 일몰이 유명한 구시포에 온 만큼 산책을 나가고 싶었지만 걷기가 싫은 엄마는 안 가고 아빠와 둘이서 갯벌을 걸었다. 노을이 지는 풍경에 사람들은 사진 찍기 바빴고, 아빠도 모처럼 멋진 풍경에 사진을 찍는데 아빠 손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술을 많이 먹으니 그렇구나 싶었는데 이런 잔소리를 해도 아빠는 어차피 오늘도 술을 먹을 거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아빠와 풍경을 보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아빠가 서해 바다가 참 매력 있다며 감성적인 얘기를 하는 바람에 나는 그런 아빠를 신선하게 바라보았다. 아빠와 대화를 많이 하지 않는 데다가 이런 감성적인 대화는 더 하지 않았기에 더 특별한 시간이었다.
아빠와 감성적 토크를 마무리하고 숙소에 돌아와 꽃게를 가득 가져온 외삼촌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부모님과 외삼촌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시며 술을 연신 들이켰다. 외삼촌은 오랜만에 만난 조카 앞에서 한국사, 세계사 특강을 세 시간가량 해주셨다. 한국의 대단함, 한국 민족의 대단함을 장시간 들으니 꿈속에서도 고조선 풍경이 나올 정도였다. 술 마신 외삼촌을 댁으로 모셔드리고, 숙소로 돌아오니 본인 주량을 훨씬 넘겨 마신 아빠가 주사를 부리는 바람에 아주 잠깐 부부싸움을 눈앞에 목격하고 자식 된 도리로써 부부싸움을 말리고, 다음날 부모님께 금주령을 내렸다. 금주령을 내렸는데 한 잔이라도 마시면 나는 그 길로 서울로 돌아간다 엄포를 놓으며 말이다.
다행히 다음날은 백합 칼국수로 시원하게 해장을 시작으로 새만금 간척지, 군산 바다를 돌며 나의 금주령에 술을 마시지 않는 하루를 보낸 아빠를 볼 수 있었다.
그런 아빠를 오랜만에 그리며 둘째 날을 보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