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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과 우월감 사이에서 성장하다

각자의 삶에는 사정이 있다.

by 한창훈

아버지는 젊은 시절 중동에서 일하셨습니다.


서울로 상경해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적당한 일자리를 찾고 있던 아버지께 중동은 기회의 땅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경험과 기술을 쌓으셨고, 성실하게 일하며 돈도 모으셨습니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작업복을 입고 계셨고, 배경은 역시나 더워 보였습니다. 그 후, 무려 25년이 흘러 저는 정장을 입고 세계 3대 공항 중 하나인 인천공항을 통해 또 다른 3대 공항인 두바이로 출장을 갔습니다. 두바이는 뜨거운 곳이지만 공항은 시원하고 쾌적했습니다. 공항 문을 나서자마자 열풍과 함께 뜨거운 공기가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겨우 3분 정도 걸었을 때 마중 나온 주재원 선배의 차에 타니 다시 시원했죠. 사무실로 향하는 길. 열풍이 불어오는 길 위로 낡은 버스가 옆을 지나갔습니다. 놀랍게도 창문이 활짝 열려 있더군요. 그 안에는 인도인 노동자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땀을 흘리며 피곤에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시원한 차 안에 앉아 있는 제 자신이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몇 초 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내 상상 속 과거의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시절의 아버지, 아버지 세대는 더운 날씨 속에서도 땀을 흘리며 일을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말씀, 뉴스, 학교 선생님들의 이야기로만 그런 상황을 들었습니다. 두바이의 뜨거운 열기를 고작 3분 느끼고 시원한 곳만 다닌 저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일하셨을 아버지. 부모님 세대가 작업복을 입고 외화를 벌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제가 정장을 차려입고 거래처와 비즈니스를 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피는 못 속인다', '출신은 어쩔 수 없다'


드라마에서 가끔 접하는 대사입니다. 주로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이 결혼하려 할 때, 부유한 쪽 부모가 던지는 대사죠.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는 종류의 드라마입니다. 이 말은 주로 막장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했는데, 그 이후로 저는 한국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훗날 우리는 최순실 딸의 말을 듣게 되었죠.

‘부모 잘 만난 것도 능력이다’라고 했던가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고추로 유명한 충남 청양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구기자도 유명하답니다.) 부모님께서도 농사를 짓다가 결혼 후 무작정 서울로 오셨습니다. 그 시절 많은 분들이 그랬기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돈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셋방을 전전하며 힘겹게 살았고, 아버지께서 외국에 계실 때 홍수가 나서 어머니와 우리 형제가 물에 떠내려갈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어렸기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성실함과 과감한 투자 덕분에 ‘MY HOME’이 생겼습니다. 다만 그 시간동안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식을 돌볼 여유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의 성실함을 본받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고3 때, 몸이 너무 나빠졌고 성적은 최악이었습니다. 주위에서는 모두 재수를 권했지만, 저는 전문대를 선택했습니다. 장학금도 나오고, 빨리 졸업해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원래 좋아했던 영어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했습니다. 운이 닿아 영어 성적 하나로 4년제 대학에 편입할 수 있었습니다. 영어 관련 수업을 청강까지 포함해 열심히 들으러 다녔습니다. 원어민 교수님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청강을 부탁했는데 감사하게도 대부분 허락해 주셨습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고, IMF까지 겹쳐 영어권 유학은 꿈만 꾸다 포기했습니다. 대신 일본이 돈벌면서 공부하기 좋다는 말을 듣고 어학연수를 택했습니다. 1년간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와 학비를 모두 충당했습니다. 열심히 했고, 운도 따라주었습니다. 복학 후에도 일본어 관련 수업을 계속 청강했습니다. 졸업할 때가 되었고, 취업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당시 ‘취업 서열 추첨’이 있었는데, 편입생이었던 저는 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잠시 원망했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졸업 즈음에 저는 상경 계열 전공이면서 일본어는 원어민 수준에 영어도 꽤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소위 ‘괜찮은 스펙’을 갖춘 셈이었습니다. 운 좋게도 학과 게시판에 위 세 가지 조건이 맞는 사람을 찾는 공고가 붙었습니다. 당시 우리 전공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일본어 1급이면서 영어도 할 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에서


그렇게 저는 대기업의 해외 영업 마케팅 부서에 합격했습니다. 부모님은 정말 하루종일 친척과 지인에게 전화하며 자랑하셨죠. 첫 출근 날, 아버지는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윗분들 눈밖에 나지 않게, 이?” 이해합니다. IMF 이후 취업난이 심각했던 시절에 그렇게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눈 밖에 나지 않게. 입사 후, 저보다 능력도 스펙도 뛰어난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미국 유학파는 물론, 아예 이민 가서 살다가 온 친구들, 저보다 더 좋은 대학을 나온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열등감이 들었습니다. 심하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학교 후배들에게 자랑질을 해대고 있었습니다.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바꾸어 떠들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꼴보기 싫을 행동인지, 저만 몰랐습니다. 부족한 실력을 감추고 싶어서, 출신이 어떻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나름대로 계속해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선배들로부터는 태도가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반면 싸가지 없다며 저를 대놓고 싫어하는 선배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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