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굶주리지 않았다 – 늑대

4장. 빨간망토

by 엘리킴


나는 굶주리지 않았다.
배가 고파 그녀를 삼킨 게 아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야기 속에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 속에서
나는 악역이었다.


문을 두드리면 속이고,
말을 걸면 흉내 내고,
입을 벌리면 삼켜야만 했다.


그게 내 역할이었다.
굶지 않아도
먹어야만 했고,
울지 않아도
짐승이어야 했다.


빨간 망토는 달콤한 냄새였지만,
그건 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금기였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금기를 허락하고,
내게 죄를 씌웠다.


나는 어릴 적부터 들었다.

“늑대는 위험하다.”
“늑대는 속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보기도 전에
이미 유죄였다.


나는 포식하지 않았다.
나는 연기했다.
그들이 원하는 짐승의 얼굴을.


사냥꾼이 나를 쏘았을 때,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나는 굶주리지 않았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짐승처럼 행동한
한 마리의 이름 없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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