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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준원 Jul 27. 2019

일상이라는 기적 3

고통을 제거하는 기술 1

자신의 내면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행위, 소위 명상이라는 것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차분한 시간에 매우 낯설어하게 된다. 나도 그랬다. 조용하게 어떤 행위도 요구받지 않고 심지어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상당히 긴 시간을 가져 본 일이 대부분 사람들에게 어디 있어 본 적이 있겠는가? 짧은 시간도 쪼개서 생산적인 일에 할애해야 하루를 알차게 산다고 생각하고 살지 않는가? 대부분 명상 초보인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시간은 그저 10분이거나 길어봐야 15분이지만, 사실 10분 15분이 그렇게 길고 지루한 시간인지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의 의식을 불교에서 말하는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에 묶어 둔다는 것은 수련되지 않은 초보에게는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니 일단 제쳐 두고라도, 눈을 닫고 가급적 소리도 듣지 말고 모든 외부적 자극을 자신으로부터 차단시키는 노력을 한 번 해본다. 그냥 속는 셈 치고 ... 그런데, 이런 심정으로 10분 15분의 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분명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그렇게 있다 보면 하루 종일 자신을 옥죄고 있는 숙제나 처리해야 하는 일들, 미래에 대한 걱정거리, 가스불을 껐는지 문을 잠그고 나왔는지 같은 근거가 없거나 모호한 공포들도 올라오고, 누구도 기억할 리 없는 오래된 과거 일에 대해 혼자만 또렷이 기억해 내고는 부끄러운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고, 과거에 겪었던 아직도 보상받지 못한 억울한 일이 떠올라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이것이 너무 강하면 명상 때문에 새로 병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온갖 잡생각으로 뒤엉킨 시간을 보내더라도 명상을 하고 나서 행복감을 느낀다. 어떤 가벼워진 상쾌함이랄까.

  

이런 초보적인 명상을 통해 얻는 행복감은 어떤 대단한 환희라기보다는 어떤 정지이며 어떤 단절일 것이다. 단 10분 15분 정도의 정지와 단절! 무엇이 정지되고 무엇이 단절되었길래 과거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뿌듯한 그리고 상쾌한 행복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하루 종일 쉴 수 없었던 노동의 정지일까? 그렇다면 쉬는 날은 무조건 행복해야 하는데, 대개는 더 피곤하고 짜증스럽기 일쑤였지 않은가? 쉴 새 없이 울어 대는 핸드폰 알람일까? 이것도 그냥 딱 꺼버리고 있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소식을 놓칠까 봐 오히려 더 불안해서 노심초사하다가 얼마 못 가서 그냥 다시 켜버리지 않는가? 소음과 불쾌한 냄새일까? 눈을 감고 있어서일까? 나의 의식 작용? 아니면 그 시간 동안 내 존재함의 정지일까? 명상으로 의식 작용을 멈추게 하거나 존재함을 정지시킬 수 있다는 말은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믿기지는 않는다. 더구나 초보적인 명상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의식을 정지시키거나 존재함을 정지시키는 일은 분명 지나치게 거창한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사실 아주 단순한 이유를 찾아보면 답이 나온다. 초보적인 명상이니 초보적인 답이지만, 외부적 자극의 중단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자신을 흔들어 대던 바이브레이션 진동기를 끄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라면 외부적 자극은 그것이 무엇이든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원초적으로 고통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명상으로 스스로 알아내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동안 자신이  지속적으로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혼이 빠지게 덜덜덜 떨리면서 살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날마다 잠을 깨서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신속하게 새로운 정보를 흡입하고, 빠르게 샤워하고, 챙겨 입고, 복잡한 도로를 통과하여 시간 안에 근무지에 도착해서, 지시를 접수하고, 업무에 착수하는 활기 넘치는 뉴요커 스타일의 삶이라면 고통의 레벨을 어렵지 않게 최고조로 올릴 수 있다. 무를 잘 처리할수록 풀기 어려운 과제가 자기 앞에 더 많이 쌓이고, 하루 종일 연속되는 인간관계가 주는 긴장에 익숙하여 스트레스라는 느낌도 잊어버린다. 그런 외부적 자극들은 그 끝에는 바늘도 달려 있어서 지속적으로 상처를 긁어대면서, 피도 나도 고름도 채이면서, 새살이 돋아나면 거기다 또 찔러 대고 하면서 살았는데 정작 스스로는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있는 셈이다.

 

며칠 전 동네 샤부샤부 식당에 식구들과 밥을 먹으러 갔는데, 갑자기 정전이 된 일이 있었다. 암전이다. 무대에 있던 끓던 솥도 보이지 않고, 빠알간 고기와 하얀 두부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정한 마누라와 고기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아이의 얼굴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와 함께 아직 치우지 않아 지저분한 옆 테이블도 사라지고, 무질서한 무늬의 식당안 사람들의 와글거리는 모습도 사라졌다. 그런데 나는 짜증이 나기는커녕, 식당 주인이 다시 스위치를 올리기 전까지의 1,2분 동안 아주 특별한 쾌감이 밀려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정전에 놀라 사람들이 떠들던 입을 일제히 다무는 바람에 암전과 동시에 제공된 고요는 칠흑같이 어두운 식당을 더욱 시커멓게 만들었다. 내가 언제 이런 완벽한 선물을 받아본 적이 있었는가 생각할 정도였다. SURPRISE!! 어쩌면 명상을 할 때에도 이렇게 쉽게 완벽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명상을 한 후 행복감을 느꼈다면, 단 15분 혹은 10분이라도 그 바늘 진동기를 자신의 몸에서 떼어 놓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 뭐 대단한 환희의 세계는 아니다. 극심한 공사장의 소음이 멈추었을 때 느껴지는 편안함이 축복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것은 원래부터 당연히 그랬어야 할 일상의 그저 그런 상태일 뿐이다.


공포영화의 예술성은 극장 안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비현실적인 비참함과 혐오스러움, 그리고 극한의 두려움을 견디고 보아야 하는 공포영화는 극장 밖으로 나온 관객이 클로크 룸 cloak room [코트 보관소]에 맡겨 놓은 자신의 일상을 찾아 입고는 그것이 아까의 모습 그대로 있음에 눈물 나게 감사하는 그 순간에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노리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극장에 들어갔을 때 극이 시작되기 전에 제공되는 암전에서 일상의 세계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행복감을 한 번 느끼고, 극이 끝나고 나면 극장 밖에서 공포가 단절되는 행복을 느끼게 된다. 첫 번째는 환상에 대한 기대에 찬 열정적 상태의 행복감이라면 뒤의 것은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의한 행복감이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일상이 이렇게 기적적으로 행복한 장소임을 절감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외부적 자극의 차단이 지속적으로 느끼던 고통을 정지시킨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외부적 자극이 대체로 고통이라는 사실에도 동의하여야 한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아니면 공포스러운 것이던 간에. 어차피 명상 초보가 한 일은 눈 감고 귀 닫고 있었던 것뿐이니까 말이다. 자본주의 속에 살지 않더라도 그러하겠지만,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더욱더, 그리고 가면 갈수록, 다양하게 펼쳐지는 상품들아 주는 자극 앞에 힘없이 스스로 옷을 벗고 있다. 고통은 그렇게 장대비처럼 쏟아져 벌거벗은 심신을 길들이는 것이다. 그 자극들은 우리의 의식을 장악하고 조종하지만 정작 옷을 벗은 것은 자기 자신이니 그로 인해 얻은 고통을 어디다 호소할 수도 없다.

 

나도 종종 겪는 일이지만 요새 이런 일 흔하지 않을까 싶다. 오후에 비가 오는지 확인하려 스마트폰을 꺼내 든 사람이라면 영락없이 걸려든다. 포털사이트 첫 화면에 떠 있는 별 중요도 없지만 자극적인 뉴스나 폭탄세일을 강조하는 상품광고 말이다. 속절없이 끌려가서 관심도 없는 여배우의 이혼기사를 읽거나,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값이 드라마틱하게 저렴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설득해가면서 구매하고 나서는 프로그램된 자동 로봇처럼 스마트폰을 닫아버린다. 정작 날씨는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안타깝게도 날씨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스마트 폰을 꺼내들기에도 장애가 가득하다. 컴퓨터에는 당장 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사의 혹은 고객의 질문 톡이 기다리고 있고, 그 새를 못 참고 대출 권유 전화는 울려대는데 건물 밖에는 함께 식사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동료들이 어슬렁거리며,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재촉하는 듯하다. 거리에는 내 시선을 잡아채기 위한 광고 배너들로 가득하고, 이것들 사이에서 어지럽게 방황하는 동안 어딘가로 끌려 들어온 자신을 발견한다. 목소리 큰 어느 동료의 결정이었울 것이다. 그 사람의 의견에 맞서기 싫어서 들어가 맘에 들지 않는 메뉴를 나누어 먹고 돈은 나누어 지불한다. 이런 상황은 친구와의 저녁식사 시간에도 가족들과 휴가를 간 동안에도 여지없이 반복해서 연출된다. 잠깐도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행동을 결정해 본 적 없다, 외부적 자극에 찔려가며 속내와 같지 않은 얼굴로 대응할 뿐이다. 그날 오후에 비가 내렸다면 이 사람 비를 쫄딱 맞았을 것이 분명하다.

 

남들이 늘어놓고 좇아갈 것을 부추기는 꿈과 환상을 동경하는 것은 넋 빠진 어린아이들이거나 사탄에 홀려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일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만의 악마를 위대한 신으로 모시는 환상적 세계를 꿈꾸는 일을 잘도 한다, 그것도 경쟁적으로. 프랑스의 라캉이라는 현대 철학자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가슴 뜨겁게 불지펴 봤자 그나마 진실한 욕구도 아니고 외부적 자극, 즉 부추겨 대는 것에 동조하면서 형성된 길들여진 욕구란 말이다.


물건을 고를 때 스스로 질을 판단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상표 의존해서 질을 평가하거나 질이 좋든 좋지 않든 관계없이 명품 브랜드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교도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주권을 빼앗긴 왕국의 허수아비 국왕처럼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지급받은 노동의  대가를 이미 브랜딩 전문가, 마케팅 전문가의 손에 넘겨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충실하게 하고 인간으로의 삶을 사는 길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좁은 길일 수밖에 없으며,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알록달록한 유혹들을 용기 있게 물리치고 들어가는 당당한 자신의 결정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래서 당위이기 이전에 논리적으로 필연이다. 은 '아니오'를 내뱉으며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남들에게 그리고 보다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물론 하나의 종교를 구독하여 종교생활을 하는 것은 스스로 선택할 힘을 기르는 훌륭한 초보적 과정이 될 수는 있지만 종교적으로 온전한 인간의 길을 가려하는 일인데도, 집단적 종교생활로 구족 하지도 않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이지만 현실이다. 노자도덕경에 대음희성, 대상무형 大音希聲 大象無形이라는 문장이 있는데, 거대한 소리는 희미하게 들리고 거대한 형상은 형체가 없다는 뜻이다. 시끄러운 곳에서는 그 위대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현란한 색색의 불빛을 보느라 달을 본 기억은 잘 없지 않은가? 


악마의 소리는 대체로 선명하고 달콤한 편이다. 위대한 성인의 말씀을 인용한 종교적 슬로건은 도처에 깔려 있지만 도시의 반짝이는 불빛은 그것들을 가려버리고 다른 의미로 변질시킬 뿐이다. 자극적인 유혹이 가성비와 파격으로 그리고 도덕과 상생을 강조하며 지친 심신에 뜨거운 파문을 일으키고 사람의 넋을 쥐고 흔들어 동전을 털어 가는 일이 반복된다. 마찬가지로 자신도 타인에게 자극적인 유혹을 제공하고 타인의 심신에 가성비와 파격으로 그리고 도덕과 상생을 앞세우며 쾌락을 제공하면서 타인의 넋을 쥐고 흔들어 동전을 털어먹는 일을 반복하는 경험적 정의가 만연해 있는 도시에서 위대한 종교적 성인들의 위대한 성취알록달록한 상품들 옆에 진열된 채로 힘겹게 경쟁하고 있다. 고전도 성인의 말씀도 이렇게 되려고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닐 것인데, 이러느니 차라리 성인의 말씀도 귀를 닫아 길이 보이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명상을 통해 외부적 자극 단절시키듯이 그런 도시의 자극과 이별할 것을 고려할 만하다. 그러면 일상은 공포영화가 아닐 것이다. 반대로 그런 자극에 일일이 사로잡혀 일희일비하면 일상은 공포영화가 된다. 공포가 멈춘 곳에서는 일상을 행복으로 여기는 마음이 오지만 달콤한 쾌락이 그 환상이 끊어졌을 때, 일상은 공포가 되기 때문이다.


단 것, 짠 것, 알록달록한 것 먹지 말아야 한다. 푹신한 소파에도 앉지 말아야 한다. 웬만하면 차를 타지 말아야 한다. 배달시켜 먹지 말고, 텔레비전은 꺼버려야 한다. 마약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와 어떻게 해서든 끊어야 한다는 면에서 다를 바가 없다. 노자는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가 서로 들리더라도 옆 마을에 왕래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중요한 가치를 잃지 않으려 외치는 진실한 말이다. 일상은 이렇게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끊어 내어만 지킬 수 있는 어떤 위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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