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업무차 아프리카에 출장을 갈 기회가 있었다. 기자분과 선교사님들의 스토리를 취재하러 가는 업무였다. 대기업에 다니시다가 안정을 누릴 만할 때에 소명을 받아 선교지로 헌신하여 나가신 겸손하고 순수하신 분이셨다.
인터뷰를 위해 세 사람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자동차로 24시간을 꼬박 가야 있는 여행지로 향했다. 이 여행은 목적지에 목표가 있다기보다는 그 24시간, 왕복으로 48시간의 시간에 목적이 있는 여행이었다.
관계라는 것이 그렇듯이 서로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물론 취재의 목적대로 선교사님의 이야기와 삶, 그 안에서 경험한 다양한 일들이 나누어졌다. 기자분이 얼추 기사에 필요한 대화를 거의 마치셨을 때였다. 일로서 대화를 하게 되면 긴장하게 되기 마련이다. 이제 일에 대한 부담도 덜고 긴장이 느슨해지면서 지금 현재의 소소한 거리들에 대해 이야기할 시점에 이르렀다. 선교사님도 제법 편해지셨는지 조심스럽게 지금의 고민을 나눠주셨다. 기자분은 믿는 분이 아니셨고 내가 목사님 자식이라고 하니 편하게 물어오셨던 것 같다. 자녀들이 청소년기에 접어 들어서 선교사역에 헌신하신 터라 자녀들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또 헌신에 대해 함께 정하고 훈련받고 선교지로 나오신 멋진 선교사님이셨다. 그런 결단을 하고 선교지에 나와서 하시는 고민이 있다 하셔서 개인적으로 매우 궁금했다.
선교사님께는 두 명의 자녀가 있는데 큰딸과 작은 아들이라 했다. 고민은 아드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몇 안 되는 교민들 중 대부분이 선교사 자녀라고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다른 선교사님 아들인 형들과 어울려 소위 야동을 보다 어른들에게 걸려 문제가 된 일이 었었다고 한다. 나는 이 평범한 사건이 온 삶을 드려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린 선교사님의 고민이라는 것이 참 반가웠다.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볼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난 나의 이야기를 해드렸다. 어른이 되어 결혼도 한 나로서는 부끄럽지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야동을 보았던 이야기부터 자위행위와 청소년기의 이성교제, 술과 담배에 대한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말씀드렸다. 선교사님은 적잖은 충격을 받으신 듯했다. 들어보니 선교사님은 야동은 물론이고 술과 담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으신 분이셨다. 청소년기에 어려운 가정형편과 사정을 이겨내고 성실히 사셔서 대기업에 들어가셨고, 믿음으로 선교에 헌신하신 분이셨다.
그런 선교사님께 야동을 보다 걸린 아들은 심각한 음란의 죄에 빠져 있다는 고민이 드실만했다. 선교지에서 다른 선교사님 자녀들과 어울려 담배와 술을 하는 것이 심각한 고민이셨던 것이다. 본인의 경험으로는 호기심으로 사춘기의 반항심으로라도 그런 일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집이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들 안에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그것이 믿음의 행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 나의 믿음의 결단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기준이 되어야 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평가하는 교만을 쉬이 행하는 게 우리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 때는…”으로 시작되는 말들이 대부분 그런 것들이 아니던가…?
목사로서 큰 결단을 하고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와 그 자녀 간의 간격은 그래서 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 친구들의 행동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행동은 그 시기에 충분히 가능한 행동이며 그때에 부모님의 반응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해드렸다. 부족하나마 중고등부 교사를 하면서 청소년들과 이야기 나누는 경험을 토대로 감히 조언도 해드렸다. 전문가도 아닌 나의 조언에도 겸손하게 경청하시는 선교사님의 모습이 참 좋았다. 시간이 지나 이런 마음이 들었다. 어떤 말을 더하는 것보다 더 기도해 주십사 하는 것이다. 돌아보니 그 눈물 기도의 소리가 자녀에게 영으로 들려질 수 있을 때 자녀들이 변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오늘 내 귀에 생생한 엄마의 기도소리처럼… 그리 될 것이라 기대해 본다.
이야기를 마칠 무렵 나의 청소년 시절에 쓰고 싶었던 책에 대해 웃으며 말씀드렸다. 선교사님은 책이 궁금하시다며 나오면 꼭 한 권 보내달라 하셨다. 적어도 그 말을 하는 시점에서는 두 사람 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피해의식 가득한 나의 생각과 경험을 정리해 기록으로 남겨 항변하고 싶었던 것이 그전까지의 목사 자식으로서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경험이 서로 다름으로 인해 간격이 벌어져가고 있는 소위 ‘믿음의 가정의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의 도구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책임으로 바뀌어지는 대목이 되었다. 아쉬운 일인지 다행인 일인지 이 글을 쓰기 위해 기억을 더듬고 글로 남기며 나는 철이 들어갔다. 철부지의 마음을 항변하고 싶었으나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것은 어린 시절 나의 경험과 부모가 된 지금의 나의 대화로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마무리하며 시원한 생각이 든다. 생각이 다 정리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억압받는 자녀로서 피해의식을 비로소 벗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부모로서의 노심초사하는 생각의 굴레에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인 것 같다. 마음껏 자녀로서 감정과 경험을 발휘해 살았다면 이제는 마음껏 부모로서의 감정과 경험을 누리고 싶다.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교감하고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이, 묵묵히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나 또한 실험무대에 서있다.
말했던 것 같은데, 이 글을 처음 시작하던 열일곱 살의 제목은 ‘목사자식도 사람이다’였다.
서른한 살 글을 쓰다 보니 가장 듣기 싫었던 질문 "너희 아빠 목사라며?"로 제목을 바꾸었다.
마흔여섯 글을 마무리하며 나는 이제 또 듣기 싫은 이런 질문 앞에 서있다.
"아이들은 신앙생활 잘하니?"
뭐가 그렇게들 궁금한지... 참나...
여전히 난 누구의 자식으로서, 이젠 누구의 부모로서의 신앙을 살 마음은 없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입장이 바뀌어 보니 조금 더 확실 해 지는 건 지금, 오늘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관계의 확인이고 그 과정에 대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 생각해 본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을 갖고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삶에 대해 자책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나를 어린아이와 같이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또한 알아가는 과정이기에 즐거움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바람이자 선포이기도 하다.
유명인의 에세이처럼 성공한 결말이 아니어서 그런가... 끝맺음이 참 어렵다.
모쪼록 나의 이야기들이 큰 감동과 교훈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소소한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 맞아!!' 정도의 공감이라면 참 좋겠다.
어디서 말하지 못할 우리들의 이야기들... 일기장을 엿보는 정도의 재미...ㅎ
열일곱 치기에 생각했던 글,
서른하나에 초고를 쓰고,
마흔여섯에 다듬어 마무리 짓는다.
그사이 나는 개척교회 둘째 아들에서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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