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아침프로그램의 유혹
유초등부 시절 예배시간이 9시였다. 어른예배는 보통 11시이다. 우리 집에서 교회까지 걸리는 시간은 5분 정도였다. 고로 8시 55분 정도에만 나가도 지각은 하지 않았다.
주일 아침 이런 나를 붙잡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만화동산”이었다. 이불속에 누워 8시 35분부터 9시 15분까지 방영되는 이 프로그램을 보는 것이 나의 주일에 큰 낙이었다. 당연히 끝까지 본 적은 거의 없다. 앞서 말했듯이 교회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간혹, 부모님이 예배를 준비하러 일찍 나가시면 난 모든 채비를 마치고 만화동산을 시청했다. 그리고 끝나자마자 교회로 뛰어갔다. 최소한의 양심이었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9시에 예배를 드리러 앉아 있더라도 유초등부실 자리가 어느 정도 차는 시간은 9시 20분쯤이었다. 그 시간이 되어서야 교회에 나오는 녀석들이 꽤 됐었다. 나는 그 아이들이 무얼 하다 왔는지 알기 때문에 너무나도 부러웠다. 심지어는 늦게 온 녀석들에게 만화의 내용에 대해서 묻고 듣느라 설교에 집중하지 못했었다.
허튼소리지만, 주일 저녁 개그 프로그램이 인기가 좋은 이유 중에 하나는 목사님들이 시청률을 지원해 주기 때문일 것이라 확신한다. 유치하지만 그 시간에 예배드리자고 해보면 목사님들은 어떤 반응 이실라나…?
하루는 일찍 나간 줄 알았던 엄마가 방을 급습했다. 주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잔소리와 폭언, 폭력을 당하고 교회로 나섰다.
나는 울며 말했다.
“나도 만화동산 다 보고 교회 가고 싶어!!!”
엄마가 얼마나 황당했을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투정이란 말인가? 고작 만화영화 보겠다고 울면서 엄마에게 대들며 10분 전에 도착해서 예배를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15분이나 늦게 출발하겠다고 하는 아들내미의 말이 말로나 들렸을까? 그래서 호되게 꾸지람당하고 교회에 갔다. 홧김에 교회에 안 가려고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건 생사의 문제기에 어려웠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헌금을 삥땅 치는 정도였다. 마음을 달래줄 오락실에 갈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헌금을 적게 내는 것이 내가 택한 방법이었다. 문제의 과정을 좀 비약하는 것 같지만 만일 그때 엄마가 날 그렇게 호되게 꾸짖지만 않았어도 나는 헌금을 삥땅 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등학생인 나의 합리화였다) 해서 나는 교회가 끝나면 오락실로 향했다. 내 마음의 안식처와 같았던 그곳이 어찌나 좋았던지…
급 떠오르는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우리 반 선생님께서 함께 오락실에 가셨었다. 성경공부 했던 기억은 나지 않는데 함께 오락실과 그 앞 떡볶이집 갔던 기억은 생생하다. 더 신기한 사실은 당시 나를 “원사장”이라 부르시던 오락실 주인아주머니께서 지금은 우리 교회에 다니신다는 것이다. 여전히 나를 “원사장”이라 불러 주시며 사람처럼 사는 나를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로운 표정으로 대해 주신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여하튼, 초등학생시절 나의 주일은 그러했다. 주일성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당시만 해도 주일에 밖에서 돈을 쓰거나 놀러 가면 교회 어른들께 엄청 혼나던 시절이었다. 집에서도 혼나고 교회 가서도 혼나고… 정말 교회 다닐 맛이 나질 않던 시절이다. 그런데도 교회에 다닌 이유는 별거 없었다.
교회에 가면 친구, 형, 누나들이 있었다. 맛있는 거 사주고 놀아주시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침 튀기며 말씀전하 시는 전도사님이 계셨다. 그런 교회에 가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다. 감사한 것은 조금씩 자라면서 내가 언제 교회에 일찍 가게 되고 교회생활이 즐거운지 정리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배가 즐겁고 기다려지면 교회에 일찍 가게 된다.
하나님께 구하고 받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교회에 일찍 가게 된다.
교회에서 만날 사람들이 빨리 보고 싶으면 교회에 일찍 가게 된다.
위의 조건 중에서 한 가지 만이라도 충족되면 나는 교회에 일찍 갈 이유가 되었었다.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닌데, 교회의 예배가 회복되고, 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붙어 있기를 소망하며,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가 되길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중, 고등학생 시절이 되면 예배시간에 더 늦고 더 예배를 소홀히 여기게 된다. 자의식으로 가득 차서 위 세 가지 조건 중에 어느 것도 교회에서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멀뚱히 앉아 유치한 사운드에 참새처럼 따라 부르는 찬양이 재미있지 않다.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와 따분한 설교는 지겹다. 재미없는 선생님과 그분이 말해주는 두 번째 설교 또한 시간이 아깝다. 학교에서는 재미있는 친구들이 유독 교회에만 가면 재미가 없다. 이렇기에 예배에 일찍 오기는커녕 나올지 말지를 고민하는 시절이 중고등학교 시절이다. 부모님께 적절히 피할 핑계도 있다. 공부, 학원숙제, 체험활동 등… 부모님과 거래를 한다. 부모들은 적당히 타협한다. 이 시기의 고민과 방황은 누구나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만 잘 지키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은, 사춘기 시절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경험하지 않으면 이후에 신앙을 자리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래 집단의 메시지가 성경말씀보다 진리가 되고 나를 위로하는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으면 그 자리를 다시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시간과 에너지가 참 많아진다. 때문에 이때 부모로서, 신앙인으로서 사춘기시절 자녀들의 마음에 어떻게 비집고 들어 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조금 일찍 신앙에 눈을 떴었던 나의 고민은 외로움이었다. 아무도 나의 어려움을 몰라준다는 것이었다. 그 아무 도는 친구들 중에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분들이 선생님들이고 부모님이었다. 이것은 말로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당장 내일 나의 육성회비를 내지 못할 상황에 있던 엄마의 눈물의 새벽기도 소리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방황하는 형에 대한 그 기도가 가르쳐 주었다. 수련회에서 내 등에 손을 얹고 내 속마음을 모르지만 내가 잘되기를 눈물로 기도해 주시는 선생님의 그 기도소리가 가르쳐 주었다. 다시 정정하여 말하자면 선생님과 부모님들 안에 계신, 그리고 내 안에 계신 성령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한 사람의 신앙인이 자기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 어떻게 고민하며 서가는지에 대한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의 기도 응답이다.
기도하고 있는가?
내 아이를 위해, 우리 반 아이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는가?
기도하고 있는가?
내 삶을 인도하시고 책임지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 이심을 얼마나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가?
나에게 다시 각인한다.
하나님이 가르치신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내가 하나님께 더 간절히 붙어있고 더 간절히 의지하며 구한다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주일에 딴짓하는 자녀를 혼내는 것 당연히 필요하고 마땅히 해야 할 바이다.
대신 기도하고 혼내자. 나 스스로 하나님께 혼날일은 없는지 돌아보고 회개하고 혼내자.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혼내자. 하나님의 긍휼의 꾸짖음을 의지하여 혼내자. 내가 받은 꾸지람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꾸지람이 엄마가 나를 앉혀놓고 나를 놓고 울면서 기도한 것이었다.
이 아이의 인생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믿음으로 선포하고 믿음으로 올려드리자.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길 기도한다.
아… 답 안 나오는 우리 중3반 아이들에게도 주님만이 답인 것을 믿음으로 다시 한번 고백해야겠다.
대화거리
1) (자녀에게) 예배분위기는 어떠한가?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2) (아빠에게) 예배분위기는 어떠한가?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3) 이삭이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기도 하는 장면을 이야기 나누어 보라.
4) 서로 기도제목을 나누라. 그리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끝으로 아버지로서 자녀에게 안수하고 기도해 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