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자녀들이 목사가 되는 비율이 얼마나 될까?
통계자료를 찾아봐도 나오지 않았지만 주변을 보면 꽤나 많은 목사님 자녀분들 중 목사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떤 집은 3남매인데 둘이 목사고 하나는 사모인 집도 있고, 5남매 중 그러한 집도 보았다. 한편으로 부모님 직업 혹은 가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참 궁금하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 뿐 아니라, 교사의 자녀 중 교사가 되는 비율이나 판사나 의사의 자녀들이 동일한 직업을 갖게 되는 비율등이 괜스레 궁금해진다.
목사 자녀로서 재미있는(?) 이슈는 서원기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자녀들을 두고 많이들 서원기도를 하신다. 신학적으로나 성경적으로 깊게 고찰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 따지려고 드는 건 아니다.
그저 사역자들의 자녀, 혹은 믿음 좋고 신앙 좋으신 장로님, 권사님들의 자녀를 두고 하는 서원기도가 나 같은 자녀들에게는 평생을 쫓아다니는 마음의 부담과 굴레가 될 수도 있다는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순전히 이건 청소년기의 나의 마음을 쓴 것이라 하겠다. 이해심이나 고민의 깊이를 가지고 무어라 판단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내가 뱃속에 생겼을 때부터 ‘아들’이라는 확신이 드셨단다. 나와 지금의 형 사이에는 한 명의 형이 더 있었다고 한다. 불의의 사고로 둘째를 잃고 나를 가졌고, 아마 그래서 엄마는 믿음으로 확신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노라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당당히 말하고 다녔다고 하신다. 엄마가 일하던 시장통에서 내 별명은 ‘원목사’였단다. 아마도 엄마의 바람과 기도가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초등학교까지 나의 장래희망은 ‘목사’였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사춘기에 접어들며 나의 장래희망은 ‘연예인’이 되는 것이었다. 신앙이 생기고 자라가면서 내 소망은 ‘연예인’과 ‘직장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생각이 좀 자라면서부터는 ‘바른 생각을 가진 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 희망이 되었다. 간신히 무엇이 되느냐에서 어떻게 사느냐로 생각의 방향을 바꿨던 것 같다. 그리고 대학입시를 앞두고 착하게 살기 위해서 어떤 직업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사회복지사’를 선택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국제구호단체에서 일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이 글을 수정하고 있는 마흔여섯의 나는 자영업자이다...^^;;)
재미있게도 나의 이런 과정에서 부모님은 한 번도 나에게 신학을 하라고 압력을 주신적이 없으시다. 목사가 되라고 부담을 주시지 않으셨다. 어린 시절에는 그러셨었는지 모르지만 사춘기를 지날 때는 말씀이 없으셨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다면…’이란 마음이셨던 것 같다. 인간적으로는 ‘이렇게 고생이 심한 길을 굳이 자녀에게 제안하고 싶지 않다…’ 셨던 것 같다.
자녀를 낳고 아이를 위해 기도를 하기 시작하며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참 고민이 되었다. 마냥 축복하며 기도하면 되는 것인지 내가 바라고 원하는 모양대로 아이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건지가 고민이 되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할 때 아이가 갓 태어났을 무렵이었고 지금은 아이가 돌이 한참 지난 뒤이다. 첫 번째 생일날 믿는 사람들은 돌잡이 안 한다던데 재미 삼아했었다. 아이는 처음에 비행기를 잡았고 그다음 방망이를 잡았다. 아빠인 나는 스튜어듀스처럼 예쁜 판사가 될 거라 했고, 신앙 좋은 한 친구는 집 짓는 선교사가 될 거라 했다. 기도를 내 욕심대로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친구는 이제 두 살 된 딸아이의 사춘기와 사귀게 될 친구, 선생님을 위해서 매일 같이 기도한다고 한다. 그 믿음이 부럽고 그 마음이 참 귀하다 생각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으면 벌써 초등학교까지 기도할까… 나도 같은 기도를 드려보려 했으나 똑 같이는 잘 안 되는 것 같다. 믿음의 차이일 수 있고, 생각의 다름일 수 있겠다. 대신 오늘 이 아이에게 있었던 일과 내일 있을 일들 그것을 통해 아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하며 기도하게 된다.
경험이 있어서 인지 섣불리 ‘서원기도’를 하지는 않는다. ^^;
부모님의 권유 혹은 회유로 어려서부터 좋은 신앙의 기반을 다지며 잘 자라 신학대학교에 가고 목사님이 되는 분들을 종종 뵈었다. 나와는 다른 분들이라 참 신기했다. 감히 말하지만 목사의 삶을 옆에서 보아 잘 알기 때문에 좋은 점은 배우고 부족한 점은 반면교사를 삼아 역할을 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하고 쉬워 보일 수 있어 고민 없이 행하기 때문에 신실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자신이 없었다. 목사가 되어 목사처럼 사는 삶이 지루해 보였다. 아빠 목사님처럼 가난한 게 싫었다. 나에게 아빠를 닮은 모양들이 있었기 때문에 영혼들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 안 될 거라 생각했다. 한편에서는, 목사가 신앙생활 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평신도가 신앙생활 잘하는 것은 멋있어 보였다. 해서 나는 목사보다는 평신도로서 멋지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돌아보면 그건 말씀대로 살 자신이 없는 내 연약함이 구속력 없이 적당한 남들보다 나은 수준의 신앙생활을 하면 잘한다 칭찬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참 유치한 이야기 지만, 모르긴 몰라도 목사님들 사이에서 자녀들 중 ‘목사’가 된 자녀가 얼마나 있는가가 그 평가의 척도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자녀들이 장성하여 다 신앙생활 잘하고 목사가 되고 했다면 부모님의 신앙의 유산을 잘 물려받아 그렇다며 선대 목사님을 훌륭하게 세워드린다. 반면 아들이 둘이나 있는 우리 아빠는 혹 비교받거나 그 산앙의 경륜이 섣불리 평가될까 죄송스럽다. 그렇다고 죄송해서 목사가 되는 것도 좀 우습지 않은가?
이렇듯 참 편협한 시각이 나에게 있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일꾼’을 목사로 제한하는 어른들의 말을 고루하다 말하면서, 굳이 그 반발심으로 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이분법적인 사고가 그렇다.
일을 하다가 잘 안되고, 무언가 큰일이 닥치면 난 고민했었다.
‘아… 신학 하라는 말씀이신가?’
재미있게도 상황이 해결되고 문제가 사라지면 위의 고민 또한 사라진다.
부끄럽게도 나는 ‘서원기도’를 불편한 예언의 말처럼 해석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뛰어봐야 하나님 손바닥이라고, 난 무얼 해도 결국에는 목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굳이 돌아갈 필요 없이 쉽게 쉽게 가야 하는가라는 생각도 했던 터였다. 어린 나는 목사를 ‘성스러운 직업’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가 하는 일이 그거였고,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직업란에 ‘목사’라고 써왔기 때문이다. 우리 아빠는 소상공 자영업자로 목사를 하는 것이고, 큰 교회 목사님들은 대기업에 월급 많이 받는 목사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왜 아니겠는가? 그 누구도 나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도, 이해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차례 반복하며 터득한 것은 핵심이 그것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고민해야 하는 것이 목사가 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직업적 소명의식 정도가 아니었다. 정말 내가 되어야 하는 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었다. 단순하지만 이 사실이 내 마음 안에 자리 잡힌 후에 더 이상 위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 이루어 가신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에게도 그러셨고 나를 복음으로 다시 살리신 예수님이 바로 그렇다.
종종 하나님께 거래로 서원을 하는 신앙을 내 안에서 보게 된다.
‘하나님 이번 일만 잘 되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나님, 이문제만 해결되면 큰 헌금을 하겠습니다’라는 식의 신앙생활 말이다.
나 또한 이런 모습이 없지 않다 보니 하나님과 한 약속에 대해 경홀히 여기는 것에 큰 위험을 알아가고 있다. 부모님과 하나님과의 약속이지만 그 약속을 하나님은 섭리대로 인도하여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부터 나의 기도는 부모님께서 하신 그 서원이 나에게 감동과 감사로 다가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루어 가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해 달라는 기도로 바뀌어 가고 있다. 신기하게도 복음으로 사는 삶과 말씀을 가르치는 삶에 대해 소망함이 생기고 기대함이 생기고 있다. 이 일을 가장 잘 감당할 수 있는 길이라면 아멘으로 반응하겠노라 기도하게 된다.
‘목사가 되겠습니다’ 혹은 ‘선교사가 되겠습니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구원의 감동과 감사함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나의 신앙의 고백을 기도로 드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며 ‘직’이 있고 ‘업’이 있는 것을 보며 그렇게 사는 삶에 대해 동경하게 되었다. 직업을 가지고 믿음으로 치열하게 사는 삶을 동경했다.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신실하고 능력 있는 빛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나의 어린 시절 생각과는 다르게 ‘좋은 목사’, ‘착한 목사’로 사는 것이 더 어려워진 시대이다. 썩지 않게 하는 소금으로 사는 그런 삶에 대한 도전을 받는 요즘이다.
부모님의 말씀이나 기도, 성도들의 기대가 때로는 많이 불편할 수 있다. 이미 결정하고 말하는 듯한 답답함이 숨이 막힐지도 모르겠다.
그때 필요한 건 반항심이나 회피가 아니라 천천히 나의 신앙을 확인하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나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 아버지는 매우 인자한 분이셔서 그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의 때가 아직 아니라면 충분히 기다려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더디 가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로 불러 주셨다는 정체성을 명확하게 세워가는 것이 필요하다.
대화거리
1) 자녀의 태명이 무엇이었는가? 지금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그 의미와 뜻, 바람이 무엇이었나?
2) (자녀에게)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두고 기도하고 있는가?
3) 한나와 사무엘의 이야기에 대해 나누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