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교회오빠 이야기
혹시 느끼고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나에겐 왕자병이 조금 있다.
내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그런 나의 기억 속에 나는 청소년기에 소위 말하는 멋진 교회오빠였다. 과거야 어떻든 지금은 여느 교회오빠들이 다 그렇듯이 수염이 덥수룩하고 배가 나온 아저씨가 되어 있어 과거의 모습을 돌려내라는 그런 원망을 듣는 20세기 교회오빠였다.
교회오빠의 숙명은 많은 오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오해는 스스로 하는 착각에서 나오는 오해가 대부분이다. 민망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난 왕자병이 있었어서 많이도 그런 오해를 했었다.
다만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다. 장로님 딸과의 스캔들이 있었다.
말 그대로 스캔들이다.
어려서부터 교회 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사춘기를 지나면서 이성으로 보이는 때가 온다. 오빠 동생의 친교가 먼저였고 좋아하는 감정으로 왔다 갔다 하는 시기가 다들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교회 친구들이 그렇듯 유년 시절엔 발가벗고 놀다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사춘기가 되며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많아지고 함께 있는 것이 좋아 허물없이 어울려 지내는 사이였던 것 같다. 편한 이성 간의 친구였고 그것 만으로도 좋던 때였다. 그러다 보니 따로 교제를 하는 것이 아님에도 이 아이가 좋았다가 저 아이가 좋아지기도 하고 그 때문에 마음 졸이고 상처받고 하는 시기가 그때였지 않았나 싶다. 그때는 그게 사랑인 줄 알고 지내던 때였던 것 같다. 여하튼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이 친하게 놀고 몰려다니며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다.
지나고 보니 이 시기의 아이들의 그런 장난 같은 이성관계는 참 불안하다. 경험을 비추어 봐서 그런지 참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아마도 당시의 어른들이 우리들을 그렇게 여겼을 것이라 확신이 든다. 당시에는 어린 마음에 그래도 교회에서 이러고 노니 얼마나 다행이냐 생각했지만, 중등부 교사를 하는 지금은 괜히 엄한일이 발생해서 문제가 될까 싶어 쉬쉬하게 되는 나를 보게 된다.
청소년기의 감정이 워낙 변화무쌍하기에 그렇다.
아무튼, 그렇게 어울려 지내다 보니 장로님 딸과 스캔들이 났다. 뭐, 연예인은 아니지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스캔들이 차지하는 무시무시한 파워를... 나의 600만 불짜리 육감이 또다시 발휘되어 나를 쳐다보는 권사님, 집사님들의 눈빛과 수군거림에서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불리한 것은 나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나 혹은 나를 편드는 정보들은 그들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개척교회 목사님이시고 나는 그 교회를 나와 혼자 교회 다니는 이상한 아이였고, 상대는 그 교회의 장로님 딸이니 유치한 생각이지만 내가 불리했다. 스캔들의 습성상 신상 털기가 들어간다. 목사자식이 왜 그 교회에 안 나가고 다른 교회에 왔는지부터, 부모의 사정, 환경, 성적, 성격, 신앙, 교회생활, 학교생활 등... 위에 말한 정확하지 않은 불리한 정보들이 다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굳이 내 이야기를 누가 하지 않고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할 사춘기에 여기저기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여간 불편했다.
말이란 건 참 무섭다. 안 그랬으면 좋겠다.
스캔들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대부분이다.
아마도 그 일은 그냥 그렇게 잊혔다. 지웠다가 맞을 수도...
청소년기에 하는 이성 교제에 대해 뭐라 논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당시의 내 생각이 지금 많이 바뀌었고, 그렇다고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조금 예민한 시기의 그들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 언급해 보고자 했다. 청소년기에는 관심과 시선이 오히려 부담스러운 때라고들 한다. 열등감이 많아지는 때라서 일반적인 말에도 쉽게 상처받거나 의도와 다르게 꽈배기로 듣는 때이다. 때문에 칭찬도 듣고 싶지 않은 때가 그때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청소년들 스스로가 쌓아놓은 담이다. 그리고 그런 높은 담에 상처받은 부모와 선생님들이 내린 결론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은 청소년기는 관심을 받고 싶고, 칭찬을 듣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은 시기라는 것이다. 아마 일생 중에 가장 사랑에 목말라 있는 때이고, 그렇기 때문에 끝없는 사랑을 주어야 하는 부담의 시기가 청소년기인 것이다.
공감할는지 모르지만, 그 시절에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 주신 분들에 대한 깊은 존경과 감사가 어른이 되어 뒤늦게서야 깨달아지는 것이 그때에 받은 사랑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재밌게도 그 조건 없는 사랑을 생각해 보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받았던 그 사랑이라는 것이 재밌다. 내가 먼저 좋아하기도 하고 지내보니 좋아하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 시기의 청소년들은 감정 기복이 심하고 자신만이 좋아하고 선호하는 것에 마음이 쏠려지는 때라 그렇지 않은 대상에게서 받는 호의나 관심이 여간 불편하다. 반면, 자신이 호감을 갖는 대상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오해받을 말일지 모르지만 청소년기의 나를 돌아보며 하는 말인데, 때문에 청소년부 선생님은 가능한 멋있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해주면 좋겠다. 외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토록 예민한 시기이기에 멋있음은 정말 다양한 부분에서 비추어지게 된다.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대상이 되어주면 좋겠다. 아이들이 동경할 수 있는 보다 젊은 사람들이 많으면 좋겠다. 이 역시 오해할까 봐 첨언하자면 단순히 나이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멋지고 열정적인 사람, 그리하여 영이 젊은 사람은 나이에 구속받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기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다른 것으로 채웠다고 생각하기 전에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야 한다.
호감 가는 대상들을 통해 하나님이 보여야 한다.
호기심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내가 사랑하고 싶은 대상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사랑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 그런 대상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그분의 사랑만이 청소년기의 깊은 메마름의 사랑을 채워 주실 수 있다.
생수가 그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나와야만 목마름을 채울 수 있다.
이때 참 생수의 맛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방법들로 대신할 수 있다고 오해하게 된다면 먼 길을 돌아가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 같다. 아니길 바라지만....
관심은 입으로 갖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스캔들을 기억해 보자. 만약 주변에 사춘기 시절 이성에 눈을 떠가는 친구들이 있다면 관심을 다르게 표현해 보자. 예쁘다 말해주고 보기 좋다고 말해주자. 뒤에서 수군거리리는 것으로 아이들을 숨게 만들지 말고 더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 하나님은 빛이시다. 밝은 곳에서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못한다.
혹,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를 친구들과의 우정과 이성교제로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곰곰이 돌아보자. 우정과 이성교제에서 내가 진짜로 하고 있는 고민에 대한 해결과 궁금증이 해결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외로움과 걱정, 고민들이 정말 해결되었는지? 그것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빨리 하나님께로 돌이키자. 우정이 잘못되었다거나 이성교제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정체성과 존재감에 대한 질문들…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해 달라 기도하고 또 나의 사랑을 그분께 고백하자. 그 사랑에 대해서 알게 되고 믿어지게 될 때까지 붙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라는 감정 안에는 하나님의 귀한 성품이 많이 담겨있다.
아이들이 빛 앞에서 친구들과의 사랑에서, 이성과의 사랑에서, 부모와의 사랑과 이웃들과의 사랑 등 더 많은 사랑을 경험하며 그 귀한 성품을 배워가면 좋겠다.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하는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귀한 성품을 많이 배워가길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내가 자녀를 사랑하듯이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깨닫는 반전 있는 은혜가 충만하길 기대한다.
대화거리
1) (서로) 별명이 무엇인가? 좋아하는,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비슷한 점이 있는가?
2) (서로) 좋아하는 연예인은 누구인가?
3) 부모님은 어떻게 만났는가? 어디가 좋았는가? 자녀의 배우자로서 어떤 기준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