댁의 아드님을 해치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아이들과 친구하기

by 텐웰즈 원쓰

고등학교 3학년 때 짝을 하게 되면서 친해진 친구가 있다.

중학교도 같이 나오고 고등학교 2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지만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친구였다. 공부를 썩 잘하지 못하는 나였기에 고3이 되어서 정신 차려 보겠다고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학습의지를 불태우던 때에 짝을 이룬 친구였다. 공부도 제법 하는 친구였고 심성이 착한 녀석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학습의지는 금방 사그라들고 친구들과 놀고, 그러다 지친 몸으로 등잔밑이 어둡다며 맨 앞자리에서 조는 날이 더 많던 때였다. 그 친구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내가 목사 아들인 것은 알았을 것이다. 나름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앞자리에 앉은 4명의 친구들이 자주 어울렸는데 그중 내 짝만 교회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더 교회에 대한 관심이 생겼던 것 같다. 다른 두 친구도 좋은 놈들이었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게다가 세명은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50명 중 10등 안에 드는 성적의 친구들이었다.


문제는 내 성적이었다. 컨디션 좋을 때 중위권 그렇지 않을 때는 중하위권인지라 앞자리에 앉는 것 만으로 성적이 오르지는 않았다. 공부를 제법 하는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당연히 학교에서 어울려 노는 친구와 짝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다. 특히나 고3 때는 대학입시와 직결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게 당연하다. 내 짝의 부모님도 그러셨던 것 같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썩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친구들의 안부를 묻곤 하셨다. 대체로 공부도 잘하고 그전에 짝과 어울려 놀던 친구들의 안부였다. 왜 그 애들 하고는 안 어울려 노는지, 그 친구들은 공부를 잘하는지 물었다. 나의 안부와 성적도 물론 물으셨다. 그때마다 나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닌 다는 것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뭔지 모를 경계의 눈빛이 있으셨던 것 같다. 혹시라도 내가 전도하여 교회 같은 곳에 정신 팔려 성적이 떨어지기라도 할까 싶어 걱정하시는 듯했다. 행여라도 전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거나 녀석의 성적이 좋지 않으면 나랑 어울려 노느라 그리되었다고 생각하실 법했다. 짝보다 성적이 좋은 다른 두 명의 앞자리 친구들에 대한 이미지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내가 아닌 다른 녀석이 짝이었다면 좋아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놀기 좋아하고 교회 열심히 다니는 성격은 좋지만, 성적 별로인 나를 보는 친구 부모님들은 고3 시절에 만나서는 안 되는 친구였을 것이다. 우정보다는 성적이 중요한 때였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야기들은 지극히 개인적 기억에 따른 일기와도 같은 것이다. 사실에 근거하기 보다는 당시의 감정과 자격지심, 합리화 같은 것들이 발동되어 남겨져 있는 오해의 기록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그시절 그런 식으로 밖에 생각 못하는 나에 대한 회상이다)

ChatGPT Image 2025년 8월 16일 오전 09_28_54.png


“당신의 아들을 해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서든 말씀드리고 싶었다.

“당신의 아들에겐 절대로 전도하지 않겠습니다. 시험기간에는 어울리지 않겠습니다. 성적이 떨어지면 놀지 않겠습니다” 등… 어떻게 서든 나를 방어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네 집에 자주 놀러 가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아니면 몰래 갔던 것 같다.

대학 입시를 할 때까지 그랬던 것 같다. 나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부담으로 여기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눈치챘을 때 더 적극적으로 친해지는 것은 어렵다.

오히려 나는 48,49,50등 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즐겼다. 그 친구들의 집에 가면 나는 우등생이었기 때문에 시험기간에 같이 놀아도 성적이 중위권은 하는 똑똑한 친구, 대학은 갈 친구였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상처를 받고 위로받는 나였다.

감사하게도 수능을 마치고 친구는 내가 다니는 교회에 나오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녀석도 같은 부담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용기를 내어 말했던 것 같다. 내가 전도한 것이 아니다. 아마, 천국에서 정산할 때 이 친구를 전도한 건 상으로 못 받겠지 싶다. ^^;

감사하게도 48, 49, 50등 친구들도 고3짝꿍도 지금도 우정을 지속하고 있다.

재밌는 건 고3짝꿍 녀석은 함께 교회에서 찬양팀도 하고, 교사도 하고 심지어 같은 선교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다.


또래 간의 관계와 성적이 민감한 시기에 우정을 유지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굳이 신앙을 그것들과 비교하며 친구냐, 하나님이냐? 혹은 성적이냐, 신앙이냐?를 놓고 고민하게 하는 일은 믿지 않는 친구의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교회 선생님이나 사역자들의 말씀을 통해서도 쉽게 접하는 말들이다. 입장의 차이만 있을 뿐 교회 다니면 성적이 떨어지니 가지 말라고 하는 말이나, 수련회 안 가면 은혜받지 못한다고 하는 말이나 피차일반이지 않을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가기에도 부족한 청소년 시기이다. 경쟁하고, 비교하고, 눈치 보는 것은 이미 사회에서 많이 배우고 있다. 가정과 교회에서는 그것과 반대되는 참된 것을 더 많이 말하고 가르치면 어떨까…


자녀의 친구들의 성적이나 성격, 신앙을 보기보다 내 자녀의 신앙을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일반적인 사고의 사람들이 말하는 메시지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무엇이 진리인지 듣지 못하는 때이고, 참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하는 때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긍심이 아닌 조금 부족하고 연약한, 그래서 기준에 못 미치는 정체감을 자기라 오해하고 있는 아이들이 많이 보인다.

나는 성적이 좋지 않아 좋은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부모들의 눈빛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고 즐겨하는 찬양과 예배가 세상의 것들에 비해 유치하고 화려하지 않아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 같아 자랑이 되지 못하다 생각했었다. 나의 외모나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함께 어울려 놀거나 즐길 수 없음으로 도태된다 생각했고, 그런 나이기에 어딘가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청소년기에 내가 학습한 나의 정체성의 상당 부분이었던 것 같다.


어린아이 다운 것이 무엇일까? 복잡한 어른이 되어 알게 된 것은 아이들은 단순하다는 것이다. 아이가 생각이 많고 사려가 깊으면 어른스럽다고 하지 않던가? 칭찬일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너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다”는 단순한 확신을 줄 수 있다면 스스로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는 좋은 친구, 좋은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 단순한 정체성이 신앙의 가장 든든한 뿌리가 될 것에 확신한다.설마, 그래도 공부를 잘해야 좋은 친구도 사귀고 떳떳하게 전도도 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결론짓는 부모님들이 계실까?


설마…


대화거리

1) 자녀의 친한 친구 이름을 아는 대로 말해보라.

2) 아빠의 친한 친구 이름을 아는 대로 말해보라.

3) 서로에게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주라. 장점과 단점,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말해주라.

4) 요나단은 다윗에게 어떤 친구였는가? 사울에게는 어떤 아들이었는가?

keyword
이전 18화피아노 배우기 싫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