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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든지 Feb 16. 2022

서른이 던져졌다

잔인한 스물아홉이었다. 서른의 시작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무려 19년을 함께 한 우리 가족의 영원한 막내, 슈가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켜켜이 내려앉은 그리움과 흘려보낸 몇 리터의 눈물로 겨우 슈를 마음에 묻었다고 생각했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몇 달 간격으로 이별과 죽음을 겪으니 일상이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신청해 보기도, 친한 친구들을 붙잡고 엉엉 울기도 했는데, 일상으로의 빠른 회복은 왠지 모르게 죄스러웠고 마음 둘 곳은 허락되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도, 책을 읽으면서도, 영화를 보면서도, 누군가를 만나고 있을 때도,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훅 눈물이 솟았다.


떠난 개의 밥그릇을 씻으며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주인 잃은 밥그릇을 씻게 될까.

 마음은  비었는데  육신은 매일과 같이 내일 마실 커피에 담을 얼음을 얼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우습고 죄스러웠다. 어떤 삶은 끝나는데  어떤 삶은 계속된다는 , 이렇게 슬픈 일이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근한 나는 단정하고 반듯한 사람이어야 했고, 충분한 애도를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지켜오던 일상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한동안은 사람 대하는 법을 잊었다. 그런  자신이 왠지 모르게  사나워서  맞춰 대화하는  어려운 시기이기도 했다.

슬픔에 셋방살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문 밖은 바로 슬픔.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적당한 답을 고민할 여유 없이 내일은 너무나 당연한 듯 찾아온다. 알람 소리와 함께 시작된 하루는 어제와 같다. 출근 준비를 하고, 만원 전철에 몸을 싣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회사 보안카드를 찍고, 할당된 업무를 처리하고, 쓰린 공복에 커피를 몇 잔 연거푸 들이켠다. 반복되는 하루들 속 오늘과 내일의 교집합은 곧 전체와 같은 느낌이다.

퇴근 후 반쯤 감긴 눈으로 멍하니 차창에 눌어붙은 빗물 땟자국을 세다 내려야 할 곳을 놓친 적이 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지갑이며, 핸드폰이며, 읽다 만 책을 가방에 대충 허겁지겁 쑤셔 넣고 버스 카드를 찍으려는데, 카드가 보이지 않는다. 펼쳐 둔 것들을 제대로 갈무리할 여유 없이 허둥지둥하다 내릴 곳을 지나친 찝찝함. 올해로 꼭 서른을 맞이한 나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겪지 않은 앞자리 3의 챕터는 논외로 하더라도, 고작 서른이라는 숫자가 주는 중압감은 남다르다. 건실한 가정의 가장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인 서른아홉의 회사 선배도, 그 언젠가 마흔아홉을 보내셨던 부모님도, 왠지 순조롭게 저마다의 아홉수를 보낸 것 같은데, 내 스물아홉은 어설프고 어중간하면서도 살짝 아팠고, 준비되지 않은 채로 서른 앞에 내던져졌다. 앞으로 얼마나 더 반복해야 할지도 모를 폭력적으로 긴 시간이 속수무책으로 놓여 있는 듯 아득하다.

아직 축축한 아스팔트에 누군가 실수든 고의든 지분거려 놓은 발자국채로 굳어 버린 것들이 내 안에 지층처럼 쌓여 있다. 내가 나인 것이 못내 부끄러웠던 날들과 자랑스러웠던 날들이 알알이 엉긴 채로.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아이는 귀엽지 않다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억세지는 껍데기 속 여전히 어린아이 칭얼거리는 듯한 유치함은 서른이라는 나이에는 영 걸맞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나는 때로는 폐로 크게 호흡하는 법을 잊고 갓난아이의 덜 마른 머리통 끝 작은 숨구멍으로 밭은 숨을 쉰다.

희로애락에 대한 타인의 에세이는 상투적이고 감상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삶의 어느 한 꼭지에서는 불현듯 그런 지리한 표현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한 줄기 빛이 되곤 한다. 상투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곧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특수성의 일반화가 큰 위로가 되곤 한다. 어쩌면 이 세상은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묘한 공감으로 줄어드는 거리감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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