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관한 기분들
버스를 타고 시외로 나갈 때 오피스텔 건물들을 지나치는 순간이 있잖아. 그럴 때면 회색 건물 벽에 다닥다닥 붙은 성냥갑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해. 스쳐 지나는 잠시 동안, 창문 너머로 전등 실루엣이 보이고, 쌓여 있는 책무더기가 보이지. 황급히 커튼을 내리는 누군가의 손도 눈에 들어오고. 그럼 나는 상상하는 거야. 그 방에서 혼자 시간을 견디는 어떤 사람을.
그는 작은 전등만 켜둔 채 어둑어둑한 방에 누워 있어. 머리맡엔 책 몇 권이 어지러이 놓여 있을 테지. 절반쯤 읽다 덮어둔 책들, 귀퉁이가 접히고 여백에 깨알같이 글씨가 적힌 책, 커피 자국이 말라붙은 머그잔들, 비행모드로 돌려놓은 핸드폰. 며칠째 쓰지 못한 일기들. 그리고 그를 날카롭게 찔렀던 누군가의 말들.
나는 자기만의 방에 숨어 시간을 견디는 그 사람을 생각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주인공 도리언은 젊음과 감각적 쾌락만을 추구하며 온갖 기행을 저지르지만, 그럴수록 광적인 허기에 시달리게 돼. 이제 그는 자신의 추악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초상화를 필사적으로 숨기려다가, 어린 시절 숨어들곤 했던 다락에 다다르지.
결국 그가 매번 돌아오는 곳은 그 다락방이야. 자신의 비밀을 품은 곳, 현재의 자기 얼굴을 비추어주는 거울. 번듯한 삶을 살려면 숨겨야 하는 은밀한 자기혐오의 공간.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의 가정주부 수전에게, 호텔방 19호실은 익명으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야.
“내가 있는 곳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완전히 혼자 있고 싶어서요.”
그는 싸구려 시트가 깔린 그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평일 낮 시간을 보내고 가정으로 돌아오지. 그곳은 그가 자신을 내리누르던 답답함에서 벗어나 완전한 혼자로 존재하는 공간인 거야. 그런데 19호실이 편안해질수록 가정에서 자신의 자리는 점점 줄어들게 돼. 수전은 진짜 자신이 어디 있는지 혼란스럽게 되지.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떤 존재로 살아온 걸까.
오피스텔 뒤의 그 사람을 생각하는 건, 언젠가의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야. 아니, 지금도 내가 종종 그 방에 들어가기 때문이야. 나 자신을 연기하기 싫어서 나는 그 방으로 숨어들어. 그런데 이상하지. 오로지 나만 존재하는 그 방에서 오히려 나는 희미해지고 말거든.
그 방에 있는 동안 세상은 사라지고, 사랑하는 존재들은 멀어져가. 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은데 그럼에도 밖으로 나가지 못해.
책을 펼치면 나와 같은 인물들이 대신 숨을 쉬고 있어. 활자화된 그들의 삶은 묘한 위안을 주지. 그래, 책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기분은 위안이야. 자기만의 방에서 잠들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사각의 이불. 나는 이불을 덮고 활자가 주는 위안에 감싸여 잠을 청하지.
당신은 어때? 책에 대한 당신의 기분을 말해줘. (밤의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