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빈노트 Sep 20. 2022

시대 흐름의 첫 차

Dear 멘토 한기용님

시대 흐름의 첫 차시대 흐름의 첫 차

시대의 흐름 같은 게 있다. 어느 분야이건, 어떤 일을 하던지, 오랜 관습이 있고 그 관습을 빗겨 나 새로 태동하는 트렌드가 존재한다. 시대의 흐름을 만드는 사람은 위대하다. 지금까지 지켜보고 겪어본 경험에 따르면 역경과 맞바람을 뚫고 앞장서서 가는 인물은 성공과는 별개로 정말 단단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찌르면 피 한 방울 안나는 사람은 없는데 그 피 한 방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아파하는 사람이 있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 피를 훈장처럼 여기는 사람, 그런 이질적인 부류도 있다.


인문대에는 경영 또는 경제를 복수 전공해야만 냉혹한 취업 세계에서 살아남는다는 관습 같은 게 있었다. 대학교가 취업 교육의 산실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인문학도는 인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므로 다른 길을 찾아야만 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당시 문과생에게 경영/경제학과는 입학하기도, 복수 전공하기에도 턱이 높은 학과였다. 공급은 제한적인데 수요가 많으니 경쟁이 심해지는 건 당연하다. 일종의 트렌드였으니 얼마나 많은 인문학도들이 그 높은 턱에 좌절했을까. 나도 무릎 꿇었던 사람 중에 하나로 평균 학점이 4점인데도 안되는구나 하며 신세 한탄을 했었다. 그러나 사회적 문제가 될만한 편중은 부작용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동시에 새로운 길과 트렌드를 누군가 만든다. 현 상황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다. 그에 발맞춰 남들 가는 길도 못 따라가서 뒤쳐지는 게 불만이었던 나 같은 사람들은 바위랑 한판 붙기 위에 계란을 들고 그들을 따라나선다. 그렇게 경영학과 복수전공을 접어둔 채 공과대학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시대 흐름에 항상 편승하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영문과인데 개발자로 진로를 바꿀 생각을 했어?”하고 주변에서 놀라지만, 처음 진로를 변경하던 시기로 돌아가 보면 이미 많은 선구자들이 존재했다. 삼성그룹에서 인문학적 소양과 기술에 대한 이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융복합 인재 육성의 일환으로 진행한 ‘삼성 컨버전스 소프트웨어 아카데미(SCSA)’는 2013년에 처음 시행을 했다. 비전공자 출신 개발자의 대표적인 등용문으로 각광받아온 ‘멋쟁이 사자처럼'은 2013년에 서울대학교에서 처음 1기를 선발해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은 내가 2학년을 마치고 1년간 휴학을 하면서 미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시기였고 고민의 지점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해준 이정표들 덕분에 고민의 짐을 덜었다. 심지어 2009년에 설립된 모교의 정보시스템학과는 문/이과의 융복합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미션 아래 상경계열과 전자공학을 동시에 배울 수 있도록 환경 조성이 되어 있었다. 내가 가는 길이란 게 타인에게 새로워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시대 흐름의 첫 차일뿐이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런 기회들은 우리 주변에서 생각보다 많이 스치듯 지나쳐간다.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무시하거나, 용기가 없을 뿐이다.


정보시스템학과에서 한 학기의 수업을 혼자서 듣다 보니 영문학과의 동기, 후배들에게 연락이 왔다. 복수전공에 관심이 있는데 수업을 따라가는데 어려움은 없는지, 향후 진로에 대한 미래는 어떤지, 분위기는 괜찮은지 등을 궁금해했다. 이들은 실제로 다음 학기부터 수업을 같이 들었고 그중 한 명은 현재 AWS 코리아로 이직을 하여 클라우드 관련 일을 하고 있다. IT 업계의 일을 계속해나가고 있으니 관련 분야에서는 나보다 더 나은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는 친구이다. 이 후배의 커리어의 시작은 “우리 과에 공과대학 쪽 복수 전공하는 선배가 있대"라는 수군거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보다 1년 뒤처졌다고 해서 시대 흐름의 첫 차를 놓치지도 않았다. 지금이야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IT업계에 뛰어들지만 당시엔 그러지 않았다. 취업 면접을 보면서, 입사하면서 내가 들었던 “왜 영문과에서 개발자로 진로를 바꾸셨어요?”라는 똑같은 질문을 매번 들었을 거다. 생각보다 많은 선구자들이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내가 그러했듯 그들에게 영감을 받아 스스로 결정하고 용기 내어 움직였을 뿐이다.


“그때 내가 그걸 했어야 되는데.”


살다 보니 수없이 듣는 문장 중에 하나이다. 그때 그걸 하지 못한 이유는 리스크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손에 쥐고 있는 게 많아지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걸 내려놓지 못하게 된다. 유튜브 ‘EO’ 채널에도 소개된 실리콘밸리에서 20년 넘게 개발자로 근무한 ‘맥스' 한기용 님은 대기업인 삼성전자에서 커리어를 출발해 야후, 유데미 등을 거치며 느꼈던 ‘기회의 등가교환'에 관한 이야기를 남겼다.


“초기 회사에 참여하거나 도전하는 일은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버리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새로운 기회를 교환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기회와 시기를 잘 만나야만 시대 흐름의 첫 차를 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첫 차는 생각보다 느리게 출발한다. 길도 울퉁불퉁하고 운전대를 잡은 사람도 미숙한 모습을 곳곳에서 보인다. 이 미숙함을 보완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해야 출발의 동력이 생기고, 또 첫 차에 편승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있어야 출발을 한다. 그러니 우리가 생활하는 반경 내에서 첫 차를 탈 기회는 얼마든지 열려있다. 시대 흐름의 첫 차를 탈지 말지는 본인의 선택이지, 기회와 시기의 문제가 아니다.


“왜 대기업의 연봉과 복지를 포기하고 새롭게 시작하세요?”

“왜 개발자랑은 상관없는 외식업 쪽에 자리를 잡으셨어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대답할 수 있는 명쾌함이 생겼다. 하지만 아직은 대답할 타이밍이 아니다. 새로운 시대 흐름의 첫 차를 출발시키고서, 그때가 되면 사람들을 온전히 납득시킬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다.


이전 01화 그러니까 제 직업이 뭐냐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