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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노트 Oct 04. 2022

촛불 하나

Dear 이국종 교수님

촛불 하나

2019년 초, 모기업 온라인 사업부로 시작했던 우리 회사는 법인 분리를 진행했다. 모기업이라는 큰 우산에서 벗어나 하나의 법인으로 수익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숙제를 떠안은 이 시기부터 업무의 압박 강도가 심해졌다. E-commerce 생태계에서는 적자가 날 수밖에 없다는 기조가 있었다. 압도적으로 성장한 쿠팡도 수익 전환 대신 매출 성장 전략을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 입장에선 여러 가지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때의 상황을 복기하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보통의 기업들은 위기의 순간에 가장 쉬운 길을 택한다.


업무 강도를 높여 인력 효율을 증대시키는 게 첫 번째 특징이다.

두 번째는 숫자의 늪에 빠져 무엇보다도 손익을 우선시한다는 점이다.

마지막 특징으로, 이로 인해 조직 문화가 수직적으로 굳는다.


모든 기업에 적용할 순 없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런 위기의 징조가 보인 기업들은 이후 퇴사 러시가 이어졌다. 매출 증가의 포인트를 새로 만들어내거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입증하는 건 인내심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파이를 늘리기보다 파이를 분배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고,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파이 분배 방식인 인력 비용 절감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업무 강도를 늘리는 일이 조직 구성원에게 타당성을 얻으려면 일을 더 해야 하는 이유를 전달해야 한다. 회사의 비용 절감이 그 이유라면 안타깝게도 일을 더 하는 게 개인에게 보상이 될 수 없다. 퇴사 러시가 발생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변화는 법인 분리 후 1년이 지나 나에게도 찾아왔다.


이 시기에 나는 큰 성장을 이루어냈다. 많은 일을 맡으며 업무 처리에 능숙해지고 더 능률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개발자라는 직업에 적응해 팀원과 조직에게 인정받는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던 시기였다. 한편, 극단의 스트레스를 겪는 부작용이 생겼다. 하나의 업무 영역을 최소 2~3명의 인원이 맡는 게 보편적인 업무 체계라면, 당시 우리 파트는 3명이서 4개의 업무 영역을 소화했다. 인력 추가를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아직은 힘들다”였고 추후에 들어온 신입은 처음부터 교육을 통해 키워야 해 오히려 짐이 되었다. 업무 분배도 요청했으나 조직 개편을 하기 전까진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과도한 업무 중 실수가 하나 나오면 팀장님에게 불려 가 혼이 났고 속에선 울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누구는 실수를 하고 싶어서 해?”하고 속으로 심장을 쾅쾅 두들기는 하루하루였다. 내 마음속엔 촛불 하나가 타고 있었다. 쿵쾅 거리는 심장 때문에 펄럭이며 꺼질락 말락 위태롭던 시기였다.


꽤나 많은 선택의 길에서 당당하게 길을 정하고 걸어온 삶이었다. 선택에 따른 역경과 결과를 겸허히 마주하며 앞으로 한 걸음씩 걸어갔고 힘든 만큼 보람이 컸다. 비유하자면 길을 떠날 채비를 단단히 하고 손전등으로 앞길을 비추며 나아가는 탐험가였다. 반면, 이 시기는 어두운 길에서 회사가 나에게 따라오라고 채찍질하는 느낌이었다. 이 역경을 선택한 주체가 나인지 아닌지에 따라 내가 받는 상실감은 큰 폭으로 움직였다. 만약 성장을 위해 여러 업무를 맡는 걸 스스로 선택하고 실수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면 이 상황을 스트레스로만 느끼지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선택하는 주체적인 삶에 익숙해져 있던 걸지도 모른다. 삶은 선택하지 않아도 매번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고난을 준다는 걸 깨달았다.



2019년쯤 한창 매스컴에 오르내리던 이국종 교수님의 이야기가 궁금해 교수님이 쓴 ‘골든아워'를 읽었다. “봄이 싫었다"로 시작되는 중증외상센터의 기록은 힘들고 아픈 이야기를 ‘감정 없는 분노’로 표현할 수 있구나 감탄하며 아프게, 정말 아프게 읽어나갔다. 이국종 교수님의 이야기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살짝만 톡 건드려도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중증외상센터의 외과의사로서 선진화된 시스템을 한국에 도입하고자 하는 그의 사명은 매번 재정적인 문제와 정부의 정책, 주변 의사들의 따가운 시선 등에 가로막힌다. 왼쪽 눈은 거의 실명 상태이고 헬기 출동 중 부상당해 으스러진 오른쪽 어깨와 수술받은 왼쪽 다리 때문에 언제라도 의사 생명이 멈출 수 있는 몸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중증외상'이라는 분야를 널리 알리고 국내 의료 시스템의 문제점을 상기시켜준 인물로 하루하루를 버텨가며 족적을 남겼다.


“그만두고 싶다”

“이번 생은 망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들고 올라가려는 그의 처절한 몸부림은 당시 나에게 충격적이면서도 감명을 주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은 촛불 하나로 수많은 장애물을 헤쳐나가는 이국종 교수님을 보며 선택의 무게가 정말 무겁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 선택의 무게는 다소 가벼웠다. 항상 플랜 B를 염두해 두기 때문에 A라는 선택이 벽에 부딪히면 B로 넘어갈 고민을 한다. 현명하게 위기관리하는 나만의 방식이지만 그만큼 벽에 쾅 부딪혀보진 못했다. 개발자로 진로를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첫 취업 시장에서 취직에 실패했다면 IT 회사에 개발자가 아닌 기획자나 마케터로 입사지원서를 넣을 계획이 플랜 B였다. 다행히 플랜 B까지 갈 일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 기준에서 이국종 교수님이 걸어가는 꿈길은 너무도 무섭고 무거운 길이었다. 그의 손엔 언제 꺼질지 모를 촛불 하나뿐이다. 그렇게 위태롭게 걷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내가 아직 선구자의 발끝을 좇는, 꿈길을 걷는 부랑자인 이유이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부랑자가 아닌 선구자이자 개척자이다.


'골든아워'의 영향이었을까. 회사에서 겪고 있는 문제를 정면 돌파해보기로 결정했다. 당시 내가 겪고 있던 문제는 우리 회사에 개발자들이 성장하기 위한 조직 문화가 부재했다는 점이다. 어느 순간부터 개발자로서 기술적인 부분이나 트렌드를 따라가는 데 있어 정체되거나 뒤쳐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외부 세미나를 듣고 싶어 개인 연차를 올려도 업무가 바쁘다는 이유로 휴가 승인을 못 받는 날엔 상심이 더 커졌다. 그나마 회사 동기들과 스터디를 하며 욕구를 해소하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직을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억울했던 건 더 나은 개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인 내가 떠나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촛불 하나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시기였다. 어떤 호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억울하게 떠나고 싶진 않았고 한 번쯤은 벽에 쾅하고 부딪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딱 3개월만 해보자는 심정으로 앞장서서 조직문화를 바꿔보기 시작했다. 팀장님에게 찾아가 한 달에 한 번씩 팀원들 대상으로 개발 세미나를 열겠다고 말하고 세미나를 열었다. 사무실에 책을 둘 작은 서랍장을 사서 팀원들과 공유할 수 있게 몇 가지 개발 서적을 가져다 두었고 팀 비용으로 개발 서적을 매달 구매해서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MSA(Microservice Architecture) 전환을 진행하면서 적용했던 새로운 기술을 공유하고 팀원들이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개척자가 되어보려는 이 시도는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카타르시스를 주었고 그 3개월의 마음가짐과 노력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노력만큼 무언가 바뀌었냐면 그렇진 않다. 사람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등바등 대던 나도 다시 업무에 치이기 시작하면서 열화 같던 촛불이 심지가 다 타버려 더 이상 피어오르지 못했다. 내 열정도 차갑게 시들어갔다. 그 시기쯤 우울증 비슷한 게 찾아왔다. 사무실에서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거나 눈물이 쏟아지는 등 신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느꼈다. 어느날은 정신과 치료를 검색하고 있었다. 촛불 하나마저 잃어버린 나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다. 그때 이국종 교수님의 생각이 났다. 2020년 2월, 아주대 외상센터 센터장의 자리를 결국 사임한 교수님이.


 달이 지나 퇴사를 했다. 새로운 촛불 하나를 들고 꿈길을 걷는 부랑자로 돌아와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벽에 부딪힌 상처가 다행히도 훈장이 되었다. 지난날의 상처를 동력으로 삼는 이상한 부류의 사람이 점점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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