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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노트 Oct 05. 2022

선택의 이유

Dear 비플랜트 김소영님


이직을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친한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 팀에 추천 시스템 API 개발자 TO가 생겼는데 팀장님과 티타임을 한번 가지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온라인 패션 스토어의 최정상으로 달려가던 회사여서 굳이 티타임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해당 포지션은 그룹사 내 개인화/추천 서비스에 활용할 데이터 프로덕트를 제공하기 위한 API 개발 포지션으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ML 엔지니어 등과 함께 일할 수 있어 새로운 커리어를 쌓아가는데 이점이 있었다. 약속 날 당시 사무실이 있던 압구정 로데오를 방문했고 누나와 함께 해당 팀의 팀장님을 만났다. 원래 티타임을 가지려 했던 게 저녁 식사 및 술자리가 되어 조금 더 편하고 진솔하게 얘기를 나누게 됐다. 다양한 커리어를 쌓아가던 분이었고 술이 한 잔 들어가다 보니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을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듯 털어놓았다. 더 배우고 싶은 욕심이 큰데 지금의 회사는 개발 조직 문화가 부족해 이직을 생각하고 있다 말하며 최근에 시도했던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얘기도 꺼냈다.


“배우고 싶은 갈증이 커서 개발 조직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곳에서 배워보고 싶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했다. 마치 나 같은 사람들의 서사를 이미 여러 번 훑어본 사람처럼. 혹은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이직은 처음이 어렵지 한 번 하고 나면 옮기는 게 더 쉽다면서 이야기를 덧붙였다.


배우고 싶은 갈증은 어느 회사를 가도 똑같이 생겨날 거예요.
그게 선택의 이유라면 이직에 대해 깊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아 보이네요.


당시에는 이 대답의 진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별로라는 걸 돌려 말하는 건가?”하고 오해하기도 했고, 개발 조직 문화가 잘 형성되어 있는 곳으로 이직해 기술과 커리어를 향상하고 싶은 마음이면 이직의 충분한 이유가 될 거라 생각했다. 선택의 이유라는 건 개인적인 거니까. 단지 도망치듯 떠나는 형태만 아니면 된다고 믿었다. 주체적인 모습만 잃지 않으면 남들의 시선도 모두 이겨낼 수 있음을 의심치 않으며.


대답의 진위를 깨닫게 된 건 그로부터 1년이 지나고 난 뒤였다. 외식업계에 뛰어들어 자영업장을 운영하고 동료들과 F&B 회사를 설립하면서 적지 않은 식구를 채용하게 됐다. 취업을 하기 위해 면접장에 들어선 사람들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개인의 욕망을 말하는 사람, 성장을 말하는 사람, 금전적인 이유 등. 우리는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창업 희망자를 찾고 있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비즈니스에 관심이 있고 이 경험으로 창업이라는 방점을 찍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우리와 결이 맞았다. 이 조건을 보편적으로 풀어서 써보면 '시장의 요구에 부합하는 참여자가 결국 시장과 연을 맺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를 ‘수요와 공급의 합'이라고 정의한다. 


‘수요와 공급의 합'은 이직 또는 퇴사를 선택하는 문제에서도 적용이 된다. 30대가 되다 보니 이직과 퇴사를 많이 경험하게 된다. 나도 그랬고 동기 및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이직을 여러 번 하거나 퇴사를 통해 새로운 길을 걷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 과정에서 선택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옮기지 말 걸"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선택지도 현재 처한 상황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라서 이직을 선택했더니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던 수직적인 문화가 팽배하다던지, 연봉을 높일 수 있는 기회라 옮겼더니 이전 회사가 조직원들 대우에 신경 쓰면서 연봉이 재역전당했다는 등의 얘기를 듣는다. 똑같은 환경이 아니니까 늘 변수가 있다. 현재 발생하는 문제의 원인이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 귀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시각이 매번 정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배우고 싶은 갈증’ : 문제의 원인
‘데이터를 통해 비즈니스 밸류를 높이는 경험’ : 선택의 이유


문제의 원인(배우고 싶은 갈증)은 여러 가지 갈래길(이직, 퇴사, N잡, 공부 등)을 만든다. 여러 가지 갈래길 중 어떠한 이유로 인해 한 가지 길을 선택하고 이는 선택의 이유(데이터를 통해 비즈니스 밸류를 높이는 경험)가 된다. 나에게 선택의 이유가 분명했다면 데이터 프로덕트가 만들 수 있는 비즈니스 밸류에 대해, 어떤 데이터를 얼마나 다룰 수 있는지,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지 등을 궁금해하며 팀장님에게 질문하지 않았을까? 선택의 이유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잡아야 ‘수요와 공급의 합'이 만들어진다. 시장에서도 참여자가 어떠한 이유로 이 시장에 참여하는지 관심 있게 지켜보기 때문이다.


‘수요와 공급의 합'을 만드는 과정은 각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개체인지를 알아가는 일부터 시작한다.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 자신의 노력과 재능을 아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꿈길을 걷는다. 반대편에 있는 보통의 인간, 나와 같은 사람들은 나중에서야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전 MBC 아나운서이자 현 비플랜트 대표인 김소영 님을 동경해왔다. 꿈꾸던 미래의 내 모습 중 하나는 커뮤니티의 역할을 하는 책방 운영이었다. 글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 책을 통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큐레이션,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북토크 등을 할 수 있는 커뮤니티이자 책방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2017년 7월에 MBC에서 퇴사를 한 김소영 님은 두 달 후 마포구에 ‘당인리 책발전소’를 열었다. 나중에 그 소식을 접하게 되고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는지 모른다.


“나도 미래에는 이런 북카페 이상의 책방을 내고 싶어, 너무 멋있다."


당인리 책발전소를 시작으로 2022년 1월에 폐업한 책발전소 위례점, 더 완성도 있게 꾸며진 책발전소 광교점까지 오프라인 책방이 세워졌다. 이후 책발전소는 ‘책발전소 북클럽'으로 종이책 구독 서비스까지 진행하며 커뮤니티로서의 책방의 기능을 온라인으로 확장하였다. 법인을 세우고 큐레이션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며 나에겐 단순한 꿈이었던 책방을 현실에 마구 퍼뜨리는 실행력을 보며 김소영 님을 더 동경하게 됐다.



김소영 님이 쓴 책 ‘진작 할 걸 그랬어'의 프롤로그에는 MBC에서 퇴사를 하게 된 과정과 감정선을 살펴볼 수 있다. 인생이 어떻게 풀려가든, 그 길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과정을 쓴 김소영 님은 한 북토크에서 책 제목을 ‘진작 퇴사할 걸 그랬어', ‘진작 서점을 낼 걸 그랬어'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제대로 의식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그리고 뭘 할 때 기분이 좋은지를
진작 고민해 볼 걸 그랬다는 생각으로 이 제목을 지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선택의 이유를 만들지 못하던 시기였다. 문제의 원인으로 허덕이던 순간이 되어서야 나라는 사람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뭘 하고 싶은지를 탐닉하게 됐다. 개발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 셋으로는 높은 위치에서 경쟁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여타 개발자와는 다른 시야와 독특한 인사이트를 가지고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해보니 테크를 수단으로 문제 해결을 해나가는 리더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시장에는 연차가 쌓이면 자동으로 높은 위치에 오르는데, 리더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리더가 대부분이라는 문제점을 인식했다. 그렇게 퇴사를 결정했다. 리더가 될 준비를 하기 위해 경영을 하는 개발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게 선택의 이유였다.


여러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는, 중소 법인을 성공적으로 키워낸 동료들에게로.

그곳엔 외식업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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