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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노트 Oct 14. 2022

꿈이 희미해질 때

Dear 존경하는 어머니


잠을 자기 전에 행하는 의식이 있었다. 답이 안 나오는 질문을 떠올리고 고뇌하는 일.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매일 같이 질문해보지만 답이 안 나왔다. 방황하던 시기였다. 주변에선 “그래서 거기서 뭐 하고 있다 했지?”, “사업한다 하지 않았나?”하고 물어보는데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해 해답을 찾아 꿈속을 헤맸다. 어쩌다 보니 자영업자가 되었다. 좋은 회사를 뿌리치고 유망한 직업인 개발자를 내려놓은 결과가 자영업이라는 게 좋은 선택인 건지 마음속에선 의구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요리와 전혀 연관이 없던 나도 손을 도우기 위해 가끔 주방 일을 도왔다. 그러다 어느 날, 주방에 출입을 안 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동선을 잡던 초반이라 주방 집기나 비품이 완전하지 않던 시기였다. 튀김기 위에 타이머가 있었는데 기름 위 아슬아슬한 위치에 매달려 있었다. 기름에 튀김 재료를 넣고 타이머를 누르려다 놓쳤는데 본능적으로 떨어지는 타이머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필 손을 뻗은 곳이 기름이었다. 팔목까지 기름에 손을 넣었다가 놀라서 급하게 뺐는데 비명 소리조차 못한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건져낸 타이머에 묻은 기름과 팔목까지 적신 기름을 닦아 내고 동료들에게 상황 설명을 했다. 동료들은 여러 의미로 놀라며 얼른 응급실을 다녀오라고 차 키를 건네주었다. 그대로 응급실로 달려가 치료를 받았다. 꿈길을 걸을 때 생기는 상처들은 새로운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런데 기름에 화상을 입은 이 상처는 나의 꿈을 희미하게 지워가며 수렁 속으로 빠트렸다.


“못 하는 일을 하며 고생하기보다 잘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


나를 가장 잘 알던 주변인이 이 소식을 듣고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를 꺼냈다. 응원하는 마음에서, 잘 되길 바라며 지켜봤지만 다치는 일이 생기자 참을 수 없었는지 비수를 꽂았다.


“행복하지 않아 보여.”


나에게 가장 큰 문제였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해야 할 일'을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영업을 통해 외식업의 생태계와 경영자로서의 경험을 하는 게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생각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점점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야 하는 건 맞는지, 해야 한다면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대답을 못하다 보니 행복하지 않았고, 지금의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꿈이 희미해지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 무서워졌다.


어릴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꽤나 깊은 고난을 겪었다. 집안에 붙어있는 빨간딱지들, 모르는 사람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대학생 때까지 내내 나를 괴롭혔다. 어머니는 조금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 일을 나갔다. 현재는 가사도우미라고 불리며 시장성이 확보된 하나의 직업군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남의 집 일을 하는 파출부 하면 창피함을 먼저 느끼던 시기였다. 어머니는 남의 집으로, 파출부의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려 발버둥 쳤다. 사춘기에는 어머니의 직업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주부'라고 적어서 학교에 제출하곤 했다. 내가 느끼는 창피함이 먼저였다. 어른이 되어서야 어머니는 어떻게 버텼을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 어머니는 어떻게 버텼을까.


“일 할 때가 제일 좋아.”


아직도 가사도우미로 일 하시는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일을 사랑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 부끄러울 수 있는 환경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상처를 꿈길의 동력으로 만드는 이상한 부류의 사람 중 하나인 건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를 존경한다. 그 어려운 시기를 지나 파출부라는 선입견이 있던 직업이 시장성을 인증받고 어엿한 직업이 되었다. 그동안 어머니는 일을 놓지 않았다. 유능한 전문가로 인정받으며 강의를 몇 차례 했고, 어머니가 고객을 찾는 게 아니라 고객이 어머니를 찾는다. 주변에서 가장 멋있는 전문가를 꼽자면 나에겐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길에는 일의 고통이 행복으로 바뀐 계기가 존재한다. 역경을 주체적으로 이겨내고 있다는 보람, 주변 사람들에게 받는 인정, 자신의 전부인 아이들의 성장,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일을 하면서 느끼고 겪는 이러한 요인들이 어머니에게 일로써 행복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일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일, 행복한 일이란 게 영원할 수는 없다. 때론 고통과 역경을 주지만 이를 이겨내고 쌓아둔 행복이 먼 길을 떠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뜨거운 뙤약볕이 쏟아지는 7월의 여름이었다. 기회를 잘 잡고 오픈한 배달 냉면의 인기가 천장을 치면서 출근하는 게 두려울 정도의 나날이었다. 7월의 마지막 영업일에는 모두가 달라붙어 고군분투 중이었다.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숫자를 갱신하며 월 매출 1억이 얼마 안 남았음을 상기했다. 모든 동료들이 고무되어 있었다. 정말 고생을 많이 한 동료들. 동선의 효율화를 하는 일도, 매출이 오를 때마다 재료 준비 루틴을 바꾸는 일도, 매출을 올리기 위해 전략을 짜는 일도 모두가 함께 노력해 목표에 다다르기 직전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주문. 월 매출 1억을 찍고서 가게 영업을 마감했다. 서로에게 격려하고 응원해주며 7월의 마지막 영업일을 보냈다. 꿈길에 가로등 불빛이 하나 번쩍하고 켜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행복한가?”


커다란 족적은 아니어도 이루어낸 성과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어느새 직원들이 생겼다. 다행히도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나 채용한 우리가 복을 누리고 있다. 외식업이라는 생태계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자영업을 하고 있는 우리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앞으로의 시장은 어떻게 변할지, 어느 지점에 포지셔닝을 해야 할지 감이 생겼다. 조직 문화를 경험했다. 만들어보고자 하는 조직 문화를 복지와 매뉴얼, 규칙 등으로 조성하고 피드백을 받았다. 체감이 될 만큼의 성과는 아닐 수 있어도, 적어도 몇 걸음 더 나아갈만한 가로등 불빛 정도의 발판은 되었다.


“힘들다고 그만두면 빛을 못 봐.”


꿈이 희미해질 때 어머니가 걸었던 길을 돌아보았다. 내가 만든 발판의 크기는 어머니 것에 비해 얼마나 작고 초라한가. 그렇게 조금 더 불빛을 밝히며 한 걸음씩 나아가 보자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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