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공감
회사 후배와 공덕역 사거리, 즐겨가는 술집에 가서 한잔 했다. 그 곳은 가까운 형이 알려준 매콤한 골뱅이무침이 맛있는 가게였다. 소맥을 말아 골뱅이무침에 계란말이를 안주로 마시며 회사 내 여러 이야기를 두런두런 거렸다. 그 이야기 중에는 조직에 대한 험담도 있었고 스스로의 처지에 자조 섞인 한탄도 있었고 또 서로의 과거에 대한 은근한 자랑도 있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기분이 좋았다. 선후배라는 물리적인 수직관계를 떠나 설사 주변에 대한 투덜거림일지라도 부담 없이 나눌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게 은근히 뿌듯해서였다. 그러한 사소하고, 별반 생각 없는 술잔의 부딪힘이 스스럼없는 사이가 실은 가장 긍정적인 직장 내 관계일 테니까 말이다.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길 적당히 취기가 올라 간만에 생각나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했다. 그 중에는 고등학교 시절 연합동아리에서 서로의 치기에 상처를 받고 또 서로의 대책 없는 순수함에 위안을 받았던 동기도 있었고 출입처의 취재원으로 만나 동년배로서 같이 늙어가는 지인도 있었다. 또한 타사 선배이자 실없는 농담을 편히 주고받을 수 있는 지인도 있었고 또한 멀리 동해의 바닷가에서 얼굴도 모르는 청취자들에게 하루의 안부와 노래를 전하는 지인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지나간 겨울 북한산과 남설악의 눈길을 함께 헤치고 다닌 지인도 있었다. 물론 그 지인들 모두와 통화가 된 건 아니었다. 더러는 신호음만 가는 걸 세었고 몇몇은 짧게 목소리를, 또 어떤 이에겐 문자메시지로 음성을 대신했다.
이렇게 살짝 들뜬 저녁을 보내게 된 것은 순전히 날씨 탓이다. 유니클로에서 산 검정색 히트텍과 자라에서 산 회색 니트, 그리고 도이터의 내피를 겉옷으로 입고 출근을 했고 또 귀가를 했지만 그 길에서 전혀 한기를 느끼지 않았다. 그만큼 오늘 날씨가 따뜻했다는 반증이다. 지난 주말에 대관령 선자령에서 눈바람에 시달리고 눈밭에서 막영을 했었지만 어느덧 그 기억은 실제 물리적 시간의 서너 배 이상 과거의 일 인양 아득하다. 그만큼 봄이 겨울을 스스럼없이 밀어낸 덕분일 것이다.
봄이 좋은 이유 중에 하나는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 말랑해지면서 그 위에 새싹이 돋고 그 싹에서 꽃 피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 일련의 순서는 사람의 눈에 명확히 들어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저마다 고운 빛깔의 꽃은 피고 그 사이로 나비가 날아다니며 생명들의 능동적인 움직임들이 아침, 점심, 저녁 꾸준하게 이어진다. 그게 자연의 순리. 그 영속성을 절감하면 내 이성들은 무장해제가 된다. 자연의 순리를 음미한다는 건 결국 인간의 개별성과 헛된 자부심 역시 교만임을 깨닫는 과정. 그 과정에 어떤 이성적인 판단이 개입될 수 있을까 싶어서다. 봄기운의 마력이고 혼몽이고 최음이 그 과정과 동반한다.
바로 그 봄기운이 마음의 긴장들을 풀어헤쳤던 모양이다. 집에 들어와 휴대전화를 물끄러미 보다가 부끄러웠다. 취중에 전화하는 버릇이 없어졌다고 자부했지만 결국 반복 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다. 날이 풀렸다고 마음의 매듭도 느슨히 했던 게다. 허나 그 허물을 내탓하지 않으련다. 아직 몇 번의 봄을 더 맞이해야할지 모르는 삶에서 나는 마음만큼은 청춘을 유지할 것이니까. 청춘의 특권은 후회를 유예하거나 아예 무시할 수 있다는 것. 설사 그 청춘이 내 물리적인 나이에 늙어가 겉보기에는 휘발된다하더라도.
-12년전 이맘 때 쓴 글이다. 저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12번의 봄이 반복되었고 내 나이에서 청춘이란 과거가 되었다. 그 과거에 묻어 있는 12번의 봄내음을 다시 꺼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