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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을전하는남자 Jun 10. 2020

블랙독은 서현진을 연기파배우로 나아가게 하는 변곡점이다

블랙독(2019-20): 편집력이 변곡점을 만든다.

블랙독은 기간제 교사가 된 사회 초년생 고하늘(서현진)이 삶의 축소판인 ‘학교’에서 꿈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블랙독을 통해 서현진은 '로맨틱 코미디'로 규정지어진 '자신에 대한 수식어'.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다는 다짐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블랙독의 고하늘을 통해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연기철학을 보여주고자 한다. 동시에 자기가 앞서 선택한 작품들이 고하늘을 묘사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도 보여준다.


변곡점


'로맨틱 코미디'는 언젠가 모든 배우들이 바뀌는 회원제 클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블랙독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서현진 배우 스스로 다른 장르로서의 가능성을 개척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장르물로는 의학드라마인 '낭만 닥터 김사부'가 있다. 하지만 김사부에서는 '김사부'라는 매우 강력한 캐릭터 존재 자체가 드라마 주제와 같다는 걸 고려해본다면, 장르물에서 서현진 배우 스스로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작품은 블랙독이 처음이다. (모든 이미지 출처는 모두 티빙.)

블랙독에서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유독 강했던 서현진이 없다. 오로지 배우로서의 편집력을 발산하는 서현진만 있다. 이런 면에서 블랙독은 서현진을 연기파 배우로 나아가게 하는 변곡점이다.

서현진은 블랙독에서 그동안 꾸준히 쌓아온 연기의 기저에서부터 시작한다.  블랙독 드라마가 가진 유기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독립적인 생각으로 극 흐름을 맞춰간다.  고하늘이라는 캐릭터를 분해하고, 블랙독 작품에 맞도록 고하늘을 설계하고 극 안에 배치한다. 

블랙독이 도시라면, 박성순(라미란)과 고하늘은 그곳의 건물들이다. 

블랙독은 바꿀 수 없는 입시교육현장, 개인과 조직, 가치과 타협 등 학교에서 일어나는 날카로운 이야기를 다룬다. 이제 막 학교에 온 기간제 교사인 고하늘. 그녀는 스스로 문제를 헤쳐간다. 조급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결정하고 후회하지 않는다. 남들 시선보다는 자신만의 방향을 찾는다. 자존심은 버려도 자존감은 버리지 않는다. 언제나 문제를 인식하고 자기 나름대로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애쓴다. 서현진은 이 같은 고하늘이란 캐릭터를 작품에 온전히 스며들게 한다. 건축과 비교한다면  '블랙독'은 도시이며, 고하늘은 그 도시의 건물 중 하나인 셈이다.


'또 오해영'에서 오해영은 사랑을 위해 감성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블랙독의 고하늘에게 '사랑'이 들어갈 틈 자체가 없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단단히 버텨야 하는 '현실'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블랙독에서는 ‘직업으로서 배우. 어쩌면 자신에게 소명'일지도 모를 배우에 대한 '애착’이 묻어 나온다.


'덜어냄’을 통해 만들어가는 페르소나.

블랙독에서의 연기는 덜어내는 연기가 중심이다. 꽉 차고 강렬했던 기존 작품의 표현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블랙독은 '덜어냄’이다. 서현진은 항상 작품 속에서 항상 100이 아닌 120을 넣었다. 특히 백수지와 오해영이 유독 그랬다. 고하늘은 '100'도 '120'도 아닌 50.60을 넣어 200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블랙독에 관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혼돈이 온다'. 지금까지 해온 작품들을 모두 살펴보면 당연한 일이다.

상대방의 대화속도를 기다리며 하는 대사연기는 블랙독에서 유독 잘 관찰할수 있는 부분이다.

블랙독에서 덜어내는 연기는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방과 후 수업계획서 제출 후 기간제 교사들끼리의 대화 장면. "선생님 딱 중간만 해요. 우리가 내년에도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게 더 보장이 되지 않잖아요"라고 말하는 다른 기간제 교사의 말. 이 장면에서 서현진은 거의 아무런 연기를 거의 하지 않는 듯하다. 그저 상대 배우를 바라보기만 하며 힘을 뺀다. 이 같은 '힘을 빼는 묘사’는 ‘고군분투'하며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고하늘이란 인물에 생명력을 더한다.

1화에서부터 서현진은 자신만의 관점으로 고하늘이 됩니다. 블랙독이 다른 작품들과 완전히 다른 점은 서현진 배우 스스로 고하늘 자체가 된다.

'덜어냄'을 통해 만들어진 고하늘의 '주눅'과 '슬픔' 그리고 위로는 그 무엇보다 ‘보통’을 잘 담아낸 서현진을 더욱 풍성한 배우로 만든다. 이 같은 덜어내는 연기를 요구하는 건 블랙독 자체가 서현진배우에게 상황인식을 기반으로 한 연기와 인물 배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상황인식에서 시작하는 연기.

수많은 상황을 예측하며 이를 작품에 맞게 배열하는 일. 블랙독은 높은 집중도의 상황인식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다.

상황인식이란 시간과 공간 및 전체 맥락을 이해한 뒤 현재를 파악한 뒤 상황을 예측하는 개념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나온 개념으로서 공군에게 요구되는 필수 자질 중 하나다. 비행 항공 통제, 항해등 다양한 분야를 성공적으로 운용하는데 기반이 되는 개념이다.

뷰티 인사이드에서의 상황인식은 단순하다.
블랙독에서의 상황인식은 '교사'라는 인식이 전제된 상태에서 시작한다. 콘셉트가 아니라 진짜가 돼야 한다.

무엇보다 상황인식은 '감정의 진폭'과 '중의적인 상황'인식을 얼마큼 능숙하게 해석하고 익혔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뷰티 인사이드'같이 상황인식의 필요성이 적은 작품은 상황인식에서 시작하는 서현진의 연기를 보기가 어렵다. 뷰티 인사이드의 이야기 구조들은 인물관계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뷰티 인사이드의 서현진배우를 본 후 블랙독을 보면 굉장히 낯선 이유도 이 때문이다.

블랙독에서 고하늘은 이야기를 이끌면서도 관찰자도 겸한다.

블랙독의 스토리텔링이 서현진 배우들에게 상황인식을 요구하는 이유는 고하늘이 주인공이면서도 관찰자도 겸하기 때문이다. 고하늘을 중심으로 기간제 교사, 현직 교사, 교육, 입시경쟁, 학생들 간 갈등 등 현실에 기반한 교육현장을 담으려고 한다. 동시에 블랙독 자체가 실제 교육현장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고하늘을 묘사하는 방식은 캐릭터 정보'배치'가 우선이 아니다. '상황인식'에서 시작한다.

블랙독에서 많은 장면들은 사진 같은 교무실에서 시작하는 편이다.

카메라 역시 '상황인식'에 초점을 두며 촬영한다. 앞서 먼저 포스팅한 글에서 설명했듯 블랙독에서는 고하늘과 학교에 대한 유기적인 흐름이 반복되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블랙독에서 수많은 이야기 시작은 사진과 같은 교무실 장면이다. 이 같은 블랙독의 시나리오 구조 때문에 '상황인식'에 기반한 연기. 기획력과 묘사력은 기본적으로 전제된 결이 높은 편집력을 요구한다.

블랙독은 사랑의온도, 뷰티인사이드와 다르게 '학교'라는 공간 단위로 극이 전개된다.

블랙독 서사구조는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 학교라는 조직사회, 학교를 이끄는 입시라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같은 전체 구조에서 고하늘(서현진)은 가장 밑에 있다. 사랑의 온도에서는 감정을 묘사하는 중의적인 상황이 대다수다. 그러나 블랙독에서는 감정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기간제 교사라는 경험 부재와 입시환경이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고하늘을 연기해야 한다.

블랙독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황은 고하늘이 완전하게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대다수다. 수많은 벽에 마주치는 고하늘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녀는 언제나 학교와 교육시스템을 숙지하면 움직여야 한다. 그럼에도 고하늘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서현진은 블랙독에서 그동안 쌓은 모든 편집력을 고하늘에게 몰아넣는다. 특히 감정의 진폭'과 '중의적인 상황'을 적절하게 섞어내는 연기가 유독 많은데 블랙독의 많은 장면들이 서현진을 비롯한 많은 배우에게 전체 맥락을 이해한 뒤 현재를 파악한 뒤 연기를 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상황 인식으로부터 시작하는 장면들

자신을 구하고 순직한 기간제 교사를 회상하는 장면에서는 상황인식과 감점을 동시에 조합한 후 그에 맞게 배치한다. 

예를 들어 과거 자신을 구하려다 죽은 기간제 교사를 회상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은 감정선을 분명하지만 중의적인 표현이 강하다. 이러한 장면에서는 사랑의 온도에서 보여주었던 배치가 선명하게 잘 보인다.

4화에서 나오는 이 장면에 서현진 배우는 여러 감정들을 드라마 방향에 맞게 배치후 표정을 지어야 하며, 이에 맞게 움직인다. 상황인식의 중요성을 잘 알려주는 장면

1화에서 혼자 교실을 보는 모습. 4화에서 기간제 교사들을 피하면서 홀로 빨리 걸어가는 모습의 표정도 그동안 쌓은 편집력을 기반으로 순간적으로 감정을 터트리는 좋은 사례다. 슬프면서도 기쁘기도 하지만 찜찜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하늘의 상황.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타들어간다. 이 장면에서 표정은 김사부와 사랑의 온도에서 익힌 감정연기를 배치하는 연습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는 서현진, 조선주 배우 모두 상황인식에 맞는 연기를 한다. 

6화에서 중간 교사 시험문제 출제를 의논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교과 파트너인 김이분과 대화 신을 보자. 이 대화 씬에서 김이분(조 신주분) 대화를 듣는 동시에 교재를 보면서 '대본에 적힌' 장면을 묘사해야 한다. 특히 대화 중간 사진처럼 표정을 보면 과장이 아닌 '어처구니없다'라는 느낌을 매우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중의적인 상황에서의 정확한 표정은 서현전과 조신주 두 배우 모두 어색하지 않다.

이 장면 같은 경우 하준, 서현진배우 연기를 카메라라 다양하게 잡아낸다.

7화에서 도현우 선생님이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먹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영상을 보면 카메라는 고하늘을 잡고 있지만 오른쪽 위로는 도현우를 잡고 있다. 이 같은 카메라와 작업과 무관하게 두 배우는 이 장면에서 대본에 근거한 정보를 근간으로 본인이 다시 상황인식으로 하며 연기 배치를 해야 한다.


'듣기'에 초점을 둔 연기.

블랙독은 모든 배우들에게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중심으로 한 여기를 더 요구하는 편이다.

블랙독은 로맨틱 코미디 혹은 멜로물처럼 인물과 인물의 관계가 중심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가 많은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블랙독에서는 일상 대화와 업무 장면들도  유독 많이 나온다. 서현진을 비롯한 모든 배우들은 듣기에 '초점'을 둔 연기를 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말하는 장면보다는 언제나 상의하고 결정하는 장면들이 많기 때문이다. 로맨틱 코미디류와는 전혀 다른 복합적인 연기 테크닉을 요구하는 셈이다. 털털함도 과장도 없다. 블랙독에서는 끊임없이 몰아치는 학사일정만 있을 뿐이다.

블랙독에서는 뷰티 인사이드 같은 장면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중의적인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표정.

사랑의 온도와 다르게 블랙독은 '교사'라는 위치에서 이래도저래도 되는 상황이 많다.  

블랙독의 표정은 두 가지다. 첫째는 고하늘 개인의 표정이다. 이 부인은 기간제 교사 입장에서 마주하는 상황들에 대한 묘사가 중심. 고하늘 개인감정을 표현 시에는 중의적인 상황이 많는다. 사랑의 온도에서는 멍한 눈빛에서 표정이 시작하지만, 블랙독에서는 중의적인 상황에서 정확하게 방향을 설정하는 걸 볼 수 있다. 사랑의 온도에서 더하지 못한 표정 디테일을 블랙독에서는 풍성하게 집어넣는다.

 두 번째는 학교라는 조직 구성원으로서의 표정이다. 학교를 다루다 보니 회의 장면이 많다. 회의 장면 같은 경우는 한 사람의 의견도 나오거나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이끌어가는 장면이 많다. 이러한 장면에서 실제 회의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는 전적으로 배우의 상황인식에 따른다. 특히 강당 회의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일지 알 수 없다. 순간을 진짜 회의에 참여한 듯 연기를 해야 한다.

전체회의 장면 같은 경우 극 안에서 사회적 위치에 근거한 표정연기를 해야 한다.

딕션


‘식샤를 합시다’/‘또 오해영’/ ‘사랑의 온도’/‘뷰티 인사이드’의 딕션은 대체로 비슷하다. 사랑의 온도 같은 경우는 대본 단어가 부드러운 특징이 있지만 네 작품 모두 ‘하이톤’이 캐릭터 간 차별화를 하는 요소다. 반면에 블랙독은 완전히 딕션 설계가 다르다. 고하늘은 2,3톤 낮은 목소리이며 서현진 배우의 강점인 하이톤 딕션을 자주 볼 수 없을 정도다. 목소리 속도도 지금까지 서현진배우의 딕션 중 제일 느리다. 학교라는 보수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부분은 물론 학교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고하늘의 사회적 위치를 표현하기 위함도 있다. 블랙독에서는 기존 작품과 다르게 딕션과 발성의 설계 배치가 타작품보다 더 구체적이다.

블랙독의 내레이션은 신입 기간제 교사인 고하늘이 마주하는 교육현장에 대한 단상과 감정이 많다. 블랙독에서 내레이션 역할 배치가 분명하며 이는 스토리텔링에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그렇기에 독백으로 표현하는 부분은 로코와는 전혀 다른 다르다. 블랙독 고하늘의 감정을 전하는 절대적인 도구는 오로지 독백인셈이다.


의상

1화에서 옷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고하늘의 정서를 담고 있다.

의상은 드라마에서 캐릭터의 정서, 상황, 심리를 구체화하는 모두 중요한 도구다. 블랙독에서도 옷은 고하늘의 정서를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도구다. 1화에서 낙하산이라는 오해에 고하늘은 눈물을 애써 참으며 교단에 서서 교실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 무에서 시작해야 하는 상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다. 막막한 상태다.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다짐하는 손, 눈매. 슬픔보다는 '모른다'로 가득 찬 모습이다. 이때 입은 옷들을 보면 어디서 시작할지 몰라 막 입은 느낌이 강하다.

기간제 교사 1년 차 시기 고하늘의 옷은 본인에게 잘 맞지 않거나 어색함이 물씬 풍긴다.

고하늘이 입은 옷은 항상 뭔가 어색하다. 핏감이 무엇인가 맞지 않는다. 고하늘이 입은 옷이 핏이 가장 좋아지는 순간은 12화부터다.‘이제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정교사와 기간제라는 틀이 더 이상 나를 흔들 수 없다는 확신도 함께 들었다’라는 독백은 인간 고하늘이 이제 ‘교사’라는 정체성. 스스로 일부 답을 찾았음을 말한다

12화에서 '자신이 교사가 돼야 하는 이유를 알고나서부터 고하늘의 옷 핏감은 확연히 달라진다.

엘로톤과 핏이 좋은 옷을 입은 고하늘의 모습은 자신이 왜 교사가 돼야 하는지 그 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옷은 블랙독에서 고하늘의 심리를 드러내는 드라마틱한 소재다.

2년차가 되면서부터 옷 핏감은 확실히 나아진다.

14화에서부터 옷도 변한다. 학교 분위기에 익숙해 조직에 적응한 모습이다. 2년 차 초반에서 그 익숙함은 동시에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초심을 잠시 잊었음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마지막화에서 1화와 거의 같은 장면이 나오지만 옷은 전혀 다르다.

정교사가 된 고하늘의 옷은 핏감은 물론 색깔도 안정적이다.

12화에서 옷은 핏감이 좋은 선에서 끝났다. 하지만 마지막화에서는 자신감이 붙은 '핏감'이 좋은 옷. 차분한 갈색. 정돈된 옷매무새, 지적인 느낌을 표출하는 귀걸이. 고하늘은 전보다 더 자신감 있게 학생들을 바라본다. 자신만의 방향을 찾았다는 자신감. 이는 '해결했다'가 아닌 구체적인 방향을 찾은 상태를 말한다.

이와 동시에 1화와 같은 내레이션 ‘어떻게 나에게 그렇게 까지 할 수 있었던 걸까’라는 독백에는 슬픔이 사라진, 앞으로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블랙독 서사에 대해서

사극은 항상 서정적인 정서를 품고 있다. 이는 현대극은 결코 가질 수 없다. 

드라마와 영화는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감동 혹은 정서를 전한다. 대표적인 예가 사극. 이와 다르게 '현실'을 묘사하며 사람들에게 ‘문제’를 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블랙독은 후자다. 블랙독은 '대학입시'라는 압박 속에서 교사들이 ‘노동자’로서 소모되는 면에 집중한다. 뿐만 아니라 '대학 진학률'로만 판단되는 자신들의 위치와 교사로서 가진 가치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모습, 생활인으로서의 교사를 다룬다. 이는 블랙독을 집필한 박주연 작가도 실제 기간제 교사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경험이 반영된 이야기는 더더욱 현실을 반영한다.

블랙독은 노동자로서 교사를 바라보지만, 성적을 기준으로 보살핌을 받는  아이들과 외면받는 아이들도 놓치지 않는다.

'입시'라는 여전히 바뀌지 않는 환경. '입시'를 기준으로 학교와 교사를 평가하는 학부모들. '성적'을 기준으로 보살핌을 받는 아이들과 외면받는 아이들. 이를 알면서도 고민하는 교사들. 그 안에서 각자가 맡은 위치에서 고군분투하는 드라마 속 교사들은 '판타지'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블랙독은 상당히 불편한 드라마다.기억하고 싶지 않은 입시에 대한 기억을 송곳으로 계속 찌르기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학교라는 지극히 작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반복되는 경향이 많아서 느슨한 전개에 답답하다. 이는 시나리오보다는 드라마 자체 구조가 학사일정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드라마 공간을 지배하는 '입시'


드라마는 언제나 큰 흐름이 있다. 가령 ‘드림즈는 어떻게 되는가?’는 스토브리그를 이끄는 흐름이다. 이 큰 흐름 안에서 백승수 단장과 권경민 사장 간 대립, 전력 보강, 운영팀과 선수들 간 관계가 톱니바퀴처럼 계속 돌아간다. 블랙독 안 큰 흐름은 '입시’다. 입시라는 큰 흐름 안에서 대학 진학률, 고등학교 평판, 교사와 교사관계, 학생과 학생 간 이야기 흘러간다.

대다수 드라마에서는 '갈등' 혹은 '사건'들은 극적으로 해결된다. 블랙독은 없다. 드라마에서도 입시제도는 바꿀 수 없다. 드라마 자체가 입시제도를 바꾸는 시도는 애초부터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송곳같이 '현실'을 찌른다. 블랙독을 보면서 다들 자신들이 마주했던 '입시'기억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건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박성순(라미란)과 고하늘의 대화중 '선생님 저희는 어디까지 가르쳐야 하나요?'는 입시가 종착역인 고등학교 교육의 모호한 끝을 알려준다. 두 사람의 대화는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닌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생각한 질문이다.

명문대 진학율은 기업의 당기순이익과 크게 다를바가 없는게 엄연한 현실.

하지만 교사가 학생을 생각하는 자신만의 철학과 가치와 무관하게 현실에서 좋은 교사 기준은 '대학에 잘 보내는 교사'다. 대학에 애들을 잘 보내야 기간제 교사도 자리를 잡고 재계약이 가능하다. 성과급도 ‘입시 실적’이 기준이다. 블랙독은 대학 진학률이 마치 기업의 '매출' 혹은 '당기순이익'으로 평가받는 현 교육세태를 그냥 보여준다. 물론 블랙독 후반부에서는 '황보 통'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이 같은 부분을 다루지만 고하늘은 '황보 통'에게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현실만 보게 할 뿐이다. 그 뒤에 시도하는 통합교육도 '입시'라는 강력한 벽 앞에서 쉽사리 나아가지 못한다. 때때로 현실에 대한 묘사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메시지가 되기는 경우가 있다. 블랙독은 이러한 방향을 따른다.


‘고하늘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가?


서현진 배우가 참여했던 대부분 작품들은 '관계'가 이야기를 이끄는 가장 큰 힘이었다. 블랙독은 그런 게 없다. 오로지 '입시’와 ‘기간제’라는 현실이 드라마를 이끈다. 블랙독 시나리오에서 모든 ‘인물’들은 이미 주어진 상황이 있다. 고하늘도 마찬가지다. 낭만 닥터 김사부에서 윤서정은 김사부는 윤서정에게 조언하고 롤모델이 된다. 반면에 블랙독에서 고하늘의 성장은 철저히 ‘생존’에 기반한다. 첫날부터 그녀에게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고하늘은 자신과 같은 상황에 마주한 다른 이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거창한 게 아닌 작은 도움과 배려다.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 중에는 기간제 교사로 시작해 정규직이 된 사람.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지만 그들 역시 쉽사리 고하늘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어리광과 위로'가 쉽사리 들어갈 수가 없다. 이제 막 기간제 교사로 들어온 고하늘은 아무것도 모른다. 애써 감추려고 해도 교사들은 고하늘의 상황을 안다. "눈으로 이미 말하셨는데요"라며 고하늘을 간파하는 도연우 선생의 말이 대표적인 예.

박성순은 방향만을 말한다. 선택은 고하늘의 몫이다.

이카루스 반을 맡을 때 박성순 부장(라미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지금 선생님 상황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아요." 조언은 있지만, 답은 언제나 고하늘이 찾아야 한다. 박성순 부장(라미란)이 항상 고하늘 근처에 있지만 김사부처럼 ‘답’을 주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자세와 방향을 보여줄 뿐이다. 고하늘을 통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마주하는 현실 일부를 본다. 그런 면에서 고하늘은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매우 큰 캐릭터다.

고하늘은 오해영보다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더 큰 캐릭터다. 감정이 아닌 삶을 다루기 때문이다.

국어시험 복수정답 에피소드에서는 학종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내신'과 '입시'의 상관관계가 나온다. 대치고에서는 ‘기관제와 정규교사 간의 불평등한 관계’가 공기를 차갑게 만든다. ‘기간제라는 감춰야 하는 위치’. 다른 학교와의 진학경쟁, '교사들 간 관계, 진학부 일, 성과급 기준, 정교사 채용시험과 임용시험 등. '점수로 평가받는 학생들과 방과 후 수업으로 평가받는 교사들'. 고하늘은 주변 상황을 바꾸기 어렵다. 상황 자체가 항상 수많은 이익관계와 얽혀있기 때문이다.

고하늘 자신의 신념도 매 순간 복합적인 상황에 마주한다. 그녀 주변에서 생긴 갈등을 최소한으로 조절해야 한다. 최적 해결방안을 찾아내거나 수긍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거나 놓치고 있는 걸 성찰하기도 버겁다. 고하늘이 기간제 교사 2년 차가 넘어가면서 자신이 겪었던 모습을 다른 기간제 교사가 마주하는 걸 보고 먼저 손을 내밀고 돕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도움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가장 현실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이자, 우리의 자화상이다.

김사부는 상황에 완료가 있지만, 블랙독은 '완료'가 없다. 출처: 뭬이브

블랙독은 낭만 닥터 김사부와 비슷한듯하나 다르다. ‘낭만 닥터 김사부’는 '사느냐'또는 '죽느냐'라는 분명한 답이 있다. 김사부에서는 언제나 [환자를 치료한다-상황 종료]가 반복된다. 낭만 닥터 김사부 1화에서 윤서정은 긴급 개복으로 사람을 살리지만 이는 대처해야 할 ‘상황’이었다. 블랙독은 언제나 상황이 '진행형'이다.'완결'이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현실을 담아낸다. 이 같은 ‘진행형’ 구조 때문에 드라마 중간에서 나오는 독백은 거의 유일하게 '상황'에 대한 고하늘만의 ‘평가’이자 동시에 '공감'이다.


슬픔의 깊이, 대상, 범위가 다르다

오해영은 감정과 자존감에서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큰 캐릭터.

서현진의 연기는 언제나 '보통의 누군가'다. 저력 있고, 단단하다는 수식어는 고하늘에게서만 예외다. 고하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하늘’이란 캐릭터는 ‘오해영’만큼 ‘완성도’가 높다. 오해영의 눈물이 누구나 ‘보통’ 겪는 사랑의 슬픔이라면, 고하늘이 흘리는 눈물은 억누르다가 어느 순간 터지는 목이 메는 슬픔이다.

고하늘은 삶이라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공감이 큰 캐릭터다.


블랙독: 성장할 수 있다면 과거의 한계를 찾아내고 용인하지 마라.

고하늘을 통해 서현진은 자신의 기획, 표현, 편집력을 끌어올린다.

처음 블랙독 딕션을 듣는 순간 낯설지만 서현진배우님만의 처연한 목소리톤에 살짝 놀랄지 모른다. 그동안 서현진의 딕션과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한정된 장르’에 국한되지 않겠다는 강함 울림이 있다. 

‘자신의 기억 일부’를 그대로 목소리로 담아낸듯한 딕션. 스스로 변화에 노출한 도전이 보이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캐릭터를 설계하는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는 목소리부터 서현진은 자신의 편집력을 발휘한다.


서현진의 경쟁자는 '어제의 서현진'

빼는 연기가 강한 블랙독을 통해 서현진의 경쟁자는 어제까지의 서현진이 된다.

지금까지 서현진의 연기가 인물에 '더하는' 연기였다면, 고하늘은 서현진 배우의 연기중 거의 유일하게 '빼는'연기다.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말한 'less is more'이라는 말은 비단 제품 디자인에만 적용이 되는 게 아니다. 드라마는 감정을 디자인한 예술에 속하니까. 


연기는 경쟁 대상이 아니다. 연기는 드라마를 만들기 위한 도구다. 또한 연기는 자신을 다른 배우보다 더 돋보이게 하는 수단도 아니다. 블랙독은 서현진을 '로맨틱 코미디'로 한정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더욱 섬세한 연기를 기대할 배우'. 로맨틱을 넘어 좋은 연기파 배우로 스스로 도약한다.

인생은 미인대회가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의 이미지는 한때다. 블랙독은 서현진에게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는 '우아함'을 전한다.  서현진 배우는 여러 인터뷰에 '버텼다'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블랙독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기다려온 작품'이라고도 말했다. 아마도 블랙독에서 스스로가 걸어온 삶을 보지 않았기에, 이 같은 말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만큼 블랙독에서 서현진은 자신이 가진 연기를 모두 다 집어넣으며 무엇보다 빛난다.


나는 블랙독을 본 후 ‘뷰티 인사이드’와 ‘오해영’을 다시 한번 보기를 권한다. 뷰티 인사이드에서는 서현진의 연기는'자유로움'과 '우아함'보다는 여전함과 '더 나음'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제왕의 딸, 수백향’도 권한다. 오해영에서 표현한 ‘자유’가 블랙독에서는 ‘더 우아하면서도 차분함'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끝이 어디일까? 스스로 물었는데 가능성은 무한하다.  고하늘은 서현진이 이를 본인 스스로 증명한 페르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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