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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가 Mar 23. 2019

여행의 완벽한 순간들

시간의 속도 안에서 ‘지금’을 딱 낚아채는 순간

여행하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꼽아달라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 페루의 마추픽추,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를 타고 내려다보았던 기이한 풍경, 바르셀로나 곳곳의 가우디 건축물들……. 명불허전의 유명한 관광명소를 직접 눈앞에 만났을 때도 물론 좋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에서 만나는 완벽한 순간은 늘 우연히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된다. 여행에서 완벽한 순간은 나의 현재 상태와 타이밍, 운, 외부의 모든 요소가 모자라는 것 하나 없이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아닐까. 정신 차릴 틈 없이 휙휙 지나가는 시간의 속도 안에서 ‘지금’을 딱 낚아채는 순간. 하늘에서 내려온 섬광 하나가 내 머리에 충격을 주는 것처럼 불현듯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지금이야. 



#1. 태국 치앙콩메콩강변

그 새벽, 나는 갑자기 눈을 떴다. 아직 밖은 어둑했다. 여행자의 촉은 이럴 때 발휘된다. 새벽의 메콩강. 이건 꼭 봐야 해! 세수도 하지 않고, 겉옷만 간단히 걸친 채 일행이 깨지 않게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해가 뜨기 전, 서늘한 공기는 습기를 머금어 축축했다. 희부연한 사위 속에서 나는 용케도 메콩강 가는 이정표를 찾아냈다. 길만 건너면 된다더니 숙소에서 채 5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없는 적막한 골목을 지나 둑에 올라선 순간, 바로 눈앞에 메콩강변이 펼쳐져있었다. 그 순간, 나는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눈이 커다래졌다. 

그 순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갑자기 너와 눈이 마주친 기분. 물론 너는 그곳에 가만히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나 혼자 가슴 두근대며 새벽부터 한달음에 달려간 셈이지만.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가다가 갑자기 맞닥뜨린 순간, 너는 무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잠이 덜 깬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새벽의 물안개가 괜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준 건지도. 그토록 공백이 많은 세상은 처음이었다. 광막한 메콩강은 짙은 물안개에 휩싸여 그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고 거기에 존재해 있었다. 강물은 아주 천천히 흐르고, 바람은 조심스럽게 불었다. 느린 바람의 리듬에 맞추어 짙은 안개가 공간 안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듯했다. 해가 뜨기 전 세상은 마치 흑백사진 같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해가 뜨면서 조금씩 천연색을 찾아가는 과정을 홀린 듯이 지켜봤다. 고기잡이를 시작하는 현지인들도 더러 나타났다. 저 멀리 나루터에서 그물을 정리하는 소년, 낡은 나룻배를 띄워 강의 느린 속도를 따라 움직이는 어부……. 

찰칵, 찰칵. 내 카메라의 셔터소리가 생경하게 들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나에게는 마치 백 년 전 수묵화 작품 속에 빨려 들어간 듯한 비현실적인 공간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루의 밥벌이가 시작되는 심상한 일터일 뿐.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안개가 완전히 걷히자, 여느 날과 다름없는 강변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사물은 멈췄던 숨을 다시 내쉬었고, 총천연색이 사방에 입혀졌다. 그저 카메라에 담긴 모습만이 하나의 작품처럼 내 기억에 각인되었을 뿐.



#2 프랑스 남부브줄(Vesoul)

프랑스의 한 시골마을에서 3주 정도 캠프생활을 한 적이 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알록달록한 색깔의 박공지붕. 마치 빨간 머리 앤이 사는 동네를 그대로 옮겨놓은 분위기였다. 물론 낯선 외국인들과의 합숙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한국의 복잡한 도시에서만 살아왔던 내게는 평생 기억에 남을 시간들이었다. 

가장 좋았던 건 오후 티타임 시간이었다. 기다란 야외테이블에 갖가지 치즈와 빵을 내놓고, 정원에서 수확한 체리나 복숭아로 파이를 뚝딱 구워냈다. 눈부신 햇빛 사이로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청아했다. 갓 내린 커피에 우유를 살짝 섞어 즐기는 카페오레의 고소함은 환상이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배를 불리고 난 후 잔디밭에 누워있으면 훈기를 머금은 산들바람이 내 볼을 간질였다. 뭉게구름이 눈부시게 맑은 하늘을 적당히 가려줬고,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오수를 즐겼다. 당시 내가 가장 예뻐했던 피에릭이라는 프랑스 소년이 있었다. 늘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는데, 그 때도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누워있었다. 우리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대신 같은 순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씩 웃고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순간이었다. 



#3. 베트남 달랏 기차역

베트남 여행 중 한 휴양마을의 기차역이었다. 아주 오래전, 식민통치를 위해 프랑스인들이 수십 년간 공들여 만들었다는 철로는 이미 그 소용을 다해 10km남짓의 유일한 노선 하나만을 남겨둔 채 방치되었다. 그러니까 그 기차역에서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목적지만을 위해 단 한 대의 기차가 하루에 6번 운행을 하고 있었다. 그 목적지에는 린푸옥 사원이라는, 사기그릇을 깨서 모자이크로 탑을 쌓은 기묘한 불교사원이 유일한 볼거리로 남아있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기차역 한편에 무심하게 자리하고 있는 한적한 카페에 들어갔다. 1200원짜리 밀크커피는 베트남 여행 중에 만난 커피 가운데 가장 맛이 좋았다. 제법 넓은 카페에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지만 직원은 셋이나 있었다. 화장을 곱게 한 어린 여자애는 커피를 내리고, 잘생긴 청년 하나는 로스팅을 하고, 발랄하게 생긴 소년 하나는 구부정하게 앉아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아, 거기에 조끼를 입은 강아지 하나가 셋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애교를 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세상 행복한 표정이라니.

오후의 햇빛이 카페를 노랗게 물들였다. 기온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 커피 로스팅 향의 농도마저도 적절했다. 제목은 모르지만 한두 번쯤 들어본 팝송이 잔잔하게 공간을 가득 채웠는데 플레이리스트 모두가 내 취향이었다. 아, 큰일 났네. 이거 너무 완벽한데. 벽에 기대어 앉아 맛좋은 커피를 홀짝이며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 때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남편이 내 곁에 앉았다. 

그 순간이 비로소 진정으로 완벽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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