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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가 Mar 30. 2019

여행의 아침

아침식사로 여행을 기억하는 몇 가지 방법

     

미혼일 적, 나에게도 결혼생활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었다. 폭신폭신한 하얀 침구에 파묻혀 꿀잠을 자고 있는 나. 베드 테이블에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토스트를 담아 들고 가벼운 키스와 함께 나를 깨우는 그. 기분 좋은 음악이나 침실 한가득 채운 아침 햇살은 필수 옵션. 4년이 넘는 연애 동안 서로 결혼생활에 대한 로망을 나눌 때마다 읊었던 나의 주문이었다.

늘 그렇듯이 현실은 달랐다. 물론 결혼을 했다고 해서 나의 사랑하는 남자가 갑자기 생각지 못한 모습으로 갑자기 돌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의 로망은 뮤직비디오나 미국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판타지일 뿐,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새벽까지 글을 쓰는지 게임을 하는지 모를 남편은 늘 오후까지 자고 있기 일쑤였고, 그래서 아침식사 준비는 아침형 인간인 내 차지였다. 아침 햇살은 무슨. 북향이라 한낮에도 어둑한 원룸에서 시작된 우리의 신혼은 나의 로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침식사에 대한 집착

태어나서 결혼하기 전까지, 난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 7시 30분마다 온 가족이 모여 어머니가 해주시는 아침식사를 의무적으로 먹어야 했다. 그래서 약간의 집착이 있었는지도. 어쨌든 결혼 초반 남편에 대한 실망감은 한 달에 백만 원도 벌어오지 못하는 경제적인 무능함보다 아침식사 정도는 해줄 정도로 조신한 남자가 아니었다는 데 기인했다. 

그래서 여행에서 아침식사는 내게 중요했다. 빵 한 쪽이라도 좋으니 가능하면 조식을 제공하는 숙소를 선호했다. 피곤하면 저녁을 건너뛸지언정 아침은 꼭 챙겨먹곤 하는 나의 취향을, 남편은 존중해주었다.




여행자의 특권호텔 조식

투숙객의 편의와 편안함을 위해 제공되는 호텔 조식을, 나는 사랑하는 편이다. 여행자의 특권 같은 기분도 든다. 기다렸다는 듯이 펼쳐진 화려한 만찬. 빵과 소시지, 다양한 잼과 버터, 치즈, 시리얼과 오믈렛 등등, 마치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어’라고 말하는 돈 많은 남자친구 앞에 선 듯 약간 황송하기도, 조금은 우쭐해지기도 한다. 그 많은 음식을 다 맛보기도 힘들다. 사실 접시에 담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음식을 가지러 오가느라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과정이 번거롭기도 하다. 그렇게 식사 한 판을 끝내고 나면 부른 배에 진이 다 빠져버린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아침식사는 일상이다김치 같은 올리브

터키식 아침식사는 전형적인 서양 스타일의 조식에 신선함을 더한 느낌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대부분의 숙소에서 조식을 제공했는데, 메뉴는 거의 비슷했다. ‘에크멕(Ekmek)’이라 불리는 바게트 같이 생긴 빵, 두부 같은 식감의 하얀 치즈, 달걀은 스크램블이나 오믈렛으로도 제공되었지만 삶은 달걀일 경우가 더 많았다. 생 토마토와 오이도 빠지지 않았다. 좀 더 메뉴가 다양한 고급 호텔에서는 햄과 소시지, 스프링롤 같은 것들이 더해졌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절인 올리브의 맛에 눈을 떴다. 마치 김치같이 양념 종류, 삭힌 정도에 따라 종류가 어마하게 다양하다는 것도. 좋은 아침식사는 매일 똑같이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아무리 먹어도 좋아쌀국수 홀릭

질리지 않는 아침식사 하면 베트남의 쌀국수를 빼놓을 수 없다. 평소에도 워낙 쌀국수를 좋아해 자주 먹곤 했지만 본토에서 먹는 맛과 비교할 수 있으랴. 베트남에서 우리는 저렴한 여행을 추구했기 때문에 조식이 포함되지 않는 숙소에 자주 묵었다. 숙소 밖의 즐비한 노점 덕분에 아침식사에 대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조금은 거창하고 느끼한 서양식 아침식사와 달리 아시아식은 간소하고 담백하다. 노점 테이블과 의자도 보통 크기의 2/3사이즈로 축소된 듯 미니멀했다. 약간 쪼그려 앉는 듯한 자세로 자리를 잡고 앉아 ‘퍼보(소고기 쌀국수)’나 ‘퍼가(닭고기 쌀국수)’를 주문하면 현란하면서도 절제된 손짓으로 쌀국수 한 그릇이 뚝딱 제조된다. 살짝 아쉬운  양 또한 아침식사로 제격이었다. 더운 날씨에 뜨끈한 국물은 왜 그리도 술술 들어가던지. 남쪽 호치민에서 시작해 북쪽 하노이까지 올라오는 여정 동안 우리는 지역별로 조금씩 맛과 특징이 다른 쌀국수를 매일 아침 즐겼다. 2주 여행 동안 스무 그릇은 먹었을 거다. 당연히, 조금도 질리지 않았다. 쓰고 있는 지금도 조금은 멍한  아침의 쌀국수 한 그릇이 그립다. 



때로는 그들처럼에스프레소로 시작하는 아침

그래서 가끔은 현지인처럼 식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는 곳곳에 베이커리 카페가 많았다. 지구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빵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걸까. 새벽부터 베이커리에서는 갓 구운 빵을 쇼윈도에 내놓고, 조금은 바쁜 걸음으로 카페에 들른 사람들에게 에스프레소와 빵을 내놓았다. 손님들은 선 채로 커피와 작은 빵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5분이나 될까, 카페에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 더러는 신문을 읽기도 하고, 더러는 식당 주인과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쭈뼛거리며 바 앞으로 다가간 우리에게 무심한 표정으로 에스프레소와 물 한 잔을 내놓던 회색 눈동자의 직원을 기억한다. 아메리카노는 메뉴에도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포르투갈에서 에스프레소의 맛을 알게 되었다. 공복의 진한 커피 한 잔이 주는 카타르시스 같은 것도. 그들에게 아메리카노는 물에 말은 밥 같은 느낌이라는 것도.






지금은 아침을 고집하지 않는 편이다. 오전에 운동을 끝내고 마시는 커피 한 잔 정도. 내가 아침식사를 챙기는 건 오로지 여행할 때뿐이다. 애초에 아침식사 같은 일상적인 행위를 판타지에 집어넣은 내 잘못이다. 모든 아침은 아무렇지 않게 시작한다. 우리의 일상이 늘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듯이. 그래도 특별한 아침을 원한다면? 해결책은 하나. 여행을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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