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발자국 한 쌍
그날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평범한 하루였다.
하루 종일 귤을 따고, 오후엔 박스를 정리하고, 밭까지 마무리했다.
해는 거의 졌고, 사람들도 하나둘 씻으러 숙소로 돌아갔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샤워 전에 손을 씻다가,
손바닥 감각이 이상했다.
비누칠을 했는데, 거품이 나는지 마는지 감이 없었다.
손끝이 뭉툭했고,
물이 미지근한지 찬지도, 도통 구별이 안 됐다.
그게 첫 번째였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저녁을 먹고 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박스 두 개... 농막 옆에 안 옮겼지?”
평소 같으면,
‘내일 옮기지 뭐’ 하고 말았을 거다.
근데 그날따라, 괜히 그게 신경 쓰였다.
이장님 눈치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지금 안 옮기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
속삭이듯, 어디선가 들리는 듯한 소리.
“지금 가야지. 지금 해야지...”
나는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전등을 들고, 슬리퍼만 신고 밭 아래로 향했다.
그 길이,
평소보다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같은 길인데,
10분이면 될 거리가 한참 걸린 것 같았다.
무릎 아래로 습기가 차올랐고,
바지 끝은 젖는 느낌이 들었다.
손전등 불빛은 발 앞만 겨우 비췄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그냥 ‘기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뭘 보게 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귤박스는 그대로 있었다.
농막 옆, 그늘진 곳.
비닐 덮개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두 박스를 들었다.
그런데 무게가… 이상했다.
텅 빈 플라스틱 박스처럼,
‘텅’ 하고 손에 반동이 닿았다.
그런데... 무게가 이상했다.
너무 가볍다.
텅 빈 플라스틱처럼,
‘텅’ 하고 손에 반동이 닿았다.
그 순간,
박스 안에서 뭔가가 움찔했다.
바람은 없었는데.
그건, 그냥 기분이 아니었다.
걸음을 멈춘 순간,
오른쪽 귤나무 줄 사이로 무언가 스치듯 지나갔다.
처음엔 잘 보이지 않았다.
형체인지 그림자인지, 안개 때문인지... 희미했다.
나는 그쪽을 향해 손전등을 비췄다.
팔뚝에 털이 ‘쓱’ 하고 돋았다.
소리도 없이.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건 살아 있는 무언가를 본 반응이었다.
귤나무 사이에,
아이가 서 있었다.
작은 체구,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
후드가 달린 회색 외투.
바지 끝은 흙에 젖어 뭉개져 있었고,
손은 축 늘어진 채.
고개만 옆으로 살짝 꺾인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없었다.
빛을 반사하지 않는,
흰자위만 가득한 눈.
깊은 구멍처럼, 어두웠다.
그 아이는
소리도 없이 움직였다.
귤나무 줄을 따라,
그림자처럼 스르르 미끄러졌다.
발소리는 전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귤박스를 든 팔엔 힘이 빠졌고,
손가락은 굳어 있었다.
차가운 감각이 팔꿈치 안쪽까지 올라왔다.
그 아이는 절벽 끝으로 사라졌다.
뒤는 막다른 낭떠러지.
갈 곳이 없는 곳이었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입도 열리지 않았다.
몸이 무거운 게 아니라,
그 공간이 숨을 막았다.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귤박스를 든 채 절벽 앞에 서 있는 꿈을 꿨다.
어디선가,
분명 누군가가 속삭였다.
“거기다... 내려놓으면 돼.”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다... 내려놓으면 돼.”
나는 뒤돌아보려 했지만
숨이 막혀 깼다.
그리고,
침대 옆.
젖은 발자국이 있었다.
정확히 한 쌍.
작고, 흙물이 번진,
내가 눕기 전엔 없던 그것은...
아침엔 사라져 있었다.
다중 목격자 증언
- 귤박스 사건 다음날
그날 이후,
나는 밭 아래로 다시 내려가지 않았다.
사람들한테 말도 못 했다.
웃을까 봐서가 아니다.
...말로 꺼내는 순간, 그 애가 다시 나타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틀 뒤 밤,
공용 주방 옆 평상에서 술을 마시던 조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야, 너 혹시... 밭에서 뭐 본 적 있어?”
나는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나 그날... 창고에서 자다 깼는데... 누가 문을 열고 나가더라고.
슬리퍼 끄는 소리도 없이,
흙탕물 자국만 남기고 말이야.”
“형, 그거 진짜야?”
“진짜지.
아, 그리고 그날 아침. 내 신발 옆에도 젖은 발자국 하나 있었어.
왼쪽만.
발이... 되게 작더라.
애기 발처럼.”
- 현장 관리자 '이장님' 발언
이건 우리가 귤 수확 끝나고 기록 남기려고
읍사무소에서 조사하던 날,
담배 피우며 쉬는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나도 예전에, 너희처럼 젊을 때 일했지.
근데 이 밭 있잖아. 원래 밭 아니었어.”
“예전엔 뭐였는데요?”
“그 밭 원래 집터였어.
집 하나 있었지. 애 하나 데리고 사는 부부였는데…
남편이 술 먹고 그만... 애가 사라졌어.
다음 날엔 남자도 없어졌고,
그 집은 그냥 허물었지. 귤나무는 그 위에 심은 거고.”
“근데 말야...
그 남자, 애 시신을 박스에 담아서...
절벽 밑에 숨겼다는 말이 있어.”
그 아이가…
아직도,
자기를 찾고 있는 박스를 따라오는 거지.”
- 외지 인력 ‘정○○’씨 발언
“제주에 귤 농장 단기 알바 갔을 때 이야기예요.
밤에 자는데... 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에 깼어요.
근데 발소리는 없고,
제 발밑에서 ‘질척’ 하는 느낌이 들었죠.
전기가 안 들어오던 날이라 플래시 켰더니,
침대 밑에 흙물이 뚝뚝 떨어져 있었어요.
숙소는 2층이었고, 비도 안 왔는데요.”
그녀는 이후 다음날 바로 퇴소했다.
우리 모두는 그때까지 그 글이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이야기인 줄 몰랐다.
- 농기계 수리 기사 ‘박○○씨’의 무전기 기록
귤밭 인근 창고에 있던 낡은 무전기 하나.
농기계 기사들이 내부 통신용으로 쓰던 것인데,
어느 날 밤, 기계가 꺼진 상태인데도 잡음이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녹음된 일부 파일에는
아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목소리가 남아 있다.
작은 소리로
“...여기, 내려놔줘... 여기다... 내려놔줘...”
정확한 위치는 절벽 쪽 저장 창고 옆,
박스 내려놓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 귤 선별장 ‘김○○씨’ 발언
“작년에도 그랬어.
상자에 귤이 꽉 찼는데, 무게가 안 나가더라고.
텅 빈 느낌이랄까.
이상해서 열어보면 멀쩡하고.
근데 꼭 그런 상자에서 하나씩 곯은 귤이 나와.”
“곯았다는 게...?”
“겉은 멀쩡한데,
안이 썩은 귤.
그게 꼭... 누가 손으로 쥐어짜듯 터트린 모양이야.”
사람들은 이제 더는 그 아이 이야기를 대놓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귤을 따다가,
가끔씩 나무 뒤를 쳐다보게 된다.
자기 손끝 감각이 이상해질 때면,
누가 뒤에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귤박스가 너무 가볍게 느껴지면,
누군가는 말없이 내려놓고 그냥 돌아간다.
괜히... 그 아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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