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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 휴가 받으면 어디로 가지?

그래 봤자 제주도 안인데, 뭘 고민해.

by 피터팬


“오빠, 이번 여름 휴가 어디로 갈까?”

“그래 봤자 제주도 안인데, 뭘 고민해.”


습관처럼 툭 던진 말이었다.

아내는 조용히 웃었고, 그 짧은 웃음은 오래 남았다.

말은 웃음처럼 흘러갔지만, 마음 어딘가에 ‘쿡’ 하고 박혀버렸다.

그날 이후로 계속 생각하게 됐다.


‘그래 봤자 제주도 안인데’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좋은 섬을, 그 순간만큼은 아내에겐 갑갑한 섬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딘가 갇혀 있다는 감정은, 실제 거리가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걸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제주살이 2년 차.

휴가철이 되면 어김없이 제주가 뉴스에 등장한다.

‘여름엔 역시 제주’라는 말도 익숙하다.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표를 끊고, 숙소를 예약하고,

인스타그램에는 “제주 도착” 같은 문구가 넘쳐난다.


하지만 제주에 사는 우리는

그 설렘을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성수기 제주도민은

제주를 떠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이다.

그 흔한 평일 항공권조차 성수기엔 ‘1인 왕복 30만 원’이 훌쩍 넘는다.

휴가 한 번 나가려면, 숙소보다 비행기 값이 더 부담이다.

그래서 결국, 어디 안 가고 만다.

가봤자 제주도 안이니까.


하지만 그런 말이 괜히 슬플 때가 있다.

특히나 아내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웃을 때.


우리가 제주에 처음 내려왔을 때는 달랐다.


뾰족한 일자리도 없고, 수입도 불안정했지만

그때는 정말 하루하루가 ‘쉼’이었다.

무계획이었지만 자유로웠고,

매일이 낯설고 신기했고,

그날 하루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침에 눈뜨면 그냥 바다를 향해 걷고,

오름 근처 정류장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바닷가 슈퍼에서 삼각김밥을 들고 해변에 앉아 해가 지는 걸 봤다.

“우리 진짜 여기서 살게 될 줄 몰랐지?”

서로 바라보며 웃던 그 순간들.


그때는 ‘오늘 뭐 하지?’가 진짜 고민이었고,

답이 없어도 괜찮았다.

그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이곳도 '사는 곳'이 되었다.

일이 생기고, 루틴이 생기고,

급하게 전화를 받고 뛰쳐나가야 하는 순간들이 생겼다.

해가 지는 바다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이젠 그 풍경 속에서 일정 조율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며칠 전, 지인이 정선으로 휴가 간다는 얘기를 했다.


“OO가 이번에 정선 간대.”

“와~ 좋겠다. 나도 춘천 한 번 가고 싶었는데…”


그리고 이어진 우리의 대화.

“이번 여름 휴가 어디로 갈까?”

“그래 봤자 제주도 안인데, 뭘 고민해.”


그 말은, 나도 모르게 내 무게를 아내에게 던진 말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제주 살면, 일상이 휴가 아니야?”


그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10분이면 바다에 닿고, 30분이면 숲속에 도착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런 조건이 있다는 건 분명 축복이다.


하지만 현실은 늘 마음 같지 않다.


삶은 여전히 분주하고,

청소할 집이 있고, 마감할 일들이 있고,

고양이 밥 챙기고, 장도 봐야 하고,

출근할 시간은 늘 너무 빨리 다가온다.


여기서도 결국,

일은 일이고, 삶은 살아내는 것이다.


가끔은 생각난다.

제주에 처음 왔을 때,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날들.

조급함도 없었고, 비교도 없었고,

우리에겐 매일이 ‘처음’이었고,

그 처음이 곧 휴가였다.


지금도 바다는 거기 있고,

숲도 있고, 오름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그걸 누릴 수 있던 내 마음은

어쩌면 그때에만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휴가’란 꼭 어딘가로 떠나는 게 아니라

그 시절처럼, 잠시 멈춰도 괜찮다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도 제주에 산다.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이 섬에서.

하지만 때때로, 이곳이 너무 익숙해질 때면

가장 멀게 느껴지는 건 ‘쉼’이라는 단어다.


진짜 휴가는,

다시 그런 마음을 회복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그 시절의 나를 다시 꺼내보는 것.


일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았고,

속도를 내지 않아도 초조하지 않았던 그때의 나.

바람만으로도 위로받고,

아무 목적 없는 하루에도 웃을 수 있었던 그 마음.


그 마음을 다시 꺼내어

지금의 나를 다독이고,

당장 어딘가 떠나지 않아도

이 자리에서 잠시 멈출 수 있는 용기.


아마 그것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휴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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