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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 아니라 퇴사여야 하는 사람들

배우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남은 건 지침뿐이네요

by 피터팬


“그냥 좀, 안 하고 싶어요.”


요즘 주변에서 이직 준비하는 사람이 많다.

누구는 연봉이 더 좋은 곳으로,

누구는 복지가 괜찮은 회사로 옮겼다고 한다.


나도 그걸 보면서 한동안 이직 공고를 열심히 봤다.

어디가 내 스펙을 받아줄지,

어떤 회사가 지금보다 조금 더 덜 괴로울지.


근데 이상하게,

아무리 조건이 좋아 보여도

입사지원 버튼이 잘 안 눌러졌다.


가만히 생각해봤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이직일까?’


아니다.

나는 지금 그저 일이 싫다.

회사라는 공간도,

사무실의 공기, 회의, 팀장의 말투,

슬랙 알림 하나에도 숨이 턱 막힌다.


일이 바빠서 힘든 게 아니다.

일을 할 마음 자체가 고장 난 기분이다.


예전엔 배우고 싶어서 시작했다.

실무에 부딪히면서도 배우는 재미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근데 지나고 보니 남은 건

보고서 양식 외우는 능력,

윗사람 눈치 보는 요령,

불합리한 걸 받아들이는 순응력뿐이었다.


정작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이직도 의미가 없다.

그냥 다른 곳 가서 똑같이 무기력해질 게 뻔하니까.


이직은

그래도 다시 일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하는 거다.

근데 나는

그 믿음이 다 떨어졌다.


그래서 나한테 필요한 건 이직이 아니라, 퇴사다.

다른 회사로 가는 게 아니라

당분간 아무 회사에도 속하지 않는 상태.

‘일 잘하는 사람’ 역할 말고

그냥 내가 누군지부터 다시 알아보고 싶은 상태.


그런데, 그 말을 꺼내는 게 참 어렵다.

“이직한다”는 말엔 사람들이 조언을 해주고, 응원도 해주는데

“퇴사하고 좀 쉬려 한다”고 하면

표정이 달라진다.

무언가를 포기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아무 계획 없는 사람, 감정적으로 그만두는 사람.


그래서 더 조용히, 혼자 끙끙 앓는다.

퇴사를 말하지 못해서,

계속 이직을 고민하는 척하면서.


하지만 이젠 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다른 회사’가 아니라,

나한테 다시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이다.


“넌 지금 뭘 하고 싶은데?”

“계속 이렇게 살고 싶은 건 아니잖아.”


퇴사는 도망이 아니라,

버티다 버티다, 드디어 나를 돌보는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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