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너머
회사 그만두고 딱 한 달쯤 되었을 때,
나는 지현과 함께 제주에 왔다.
사귀던 사이는 끝났지만,
연락은 끊기지 않았고,
뭐랄까,
정리되지 않은 여운 같은 게 있었다.
서로에게 미련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 미련마저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
4박 5일짜리 여행을 같이 떠났다.
셋째 날 오후,
애월에서 한림으로 넘어가던 길.
빗방울이 한두 점씩 흩어졌고,
도로 위엔 습기와 흙먼지가 어울려
가벼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라디오도 꺼진 차 안에서
우리는 거의 아무 말 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때 지현이 말했다.
“우리 예전에,
제주 내려오면 집 짓자고 했던 얘기 기억나?”
나는 작게 고개를 끄떡였다.
마당 있는 집.
돌담.
감나무.
낮은 지붕.
햇살보다 안개가 자주 끼는 동네.
우리는 진심으로 그런 삶을 꿈꿨던 시기가 있었다.
몇 분쯤 흘렀을까.
지현이 갑자기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만.
저기, 오른쪽 봐봐.”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는 축축한 도로 위에서 미끄러지듯 멈췄다.
우리는 동시에
창밖을 바라봤다.
거기,
안개 사이로 조용히 서 있는 하얀 집 하나가 있었다.
지붕은 낮고 평평했으며
담쟁이 넝쿨이 반쯤 덮고 있었다.
담장은 제주 돌로 허리 높이까지 둘러져 있었고,
짧은 나무 대문은 바람에 아주 작게 흔들렸다.
대문 안쪽,
작은 마당엔
빨간 고무 대야 하나가 엎어져 있었고,
감나무 한 그루가
잎을 다 떨군 채 서 있었다.
창틀은 하얀 목재로 틀어져 있었고,
페인트가 살짝 벗겨져 있었으며,
창 안쪽엔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사이로
주황빛 형광등 불빛이
안개를 통과해 부드럽게 퍼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살림 냄새 비슷한 것이 풍겨왔다.
우린 둘 다,
그 집 안에서 누군가
막 부엌에서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기를 느꼈다.
지현이 아주 작게 말했다.
“...이거,
진짜 딱 우리가 말했던 집이다.”
나는 말없이 핸드폰을 꺼냈다.
손이 살짝 떨릴 만큼
그 집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지현도 옆에서 카메라를 켰다.
우리 둘 다,
말없이 같은 곳을 찍었다.
그 순간,
우리는 미래를 찍고 있다고 믿었다.
잠깐,
아주 짧게
다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지만
정말로 같은 꿈을 다시 꾼 것처럼.
그날 밤,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한 달쯤 후,
나는 그 사진을 다시 열었다.
그 자리에
집은 없었다.
돌담은 있었지만,
그 안은 잡초와 진흙뿐.
창문도, 감나무도, 불빛도 없었다.
나는 지현에게 연락했다.
“혹시 너도 그날 그 집 사진, 아직 있어?”
그녀가 보내온 사진도
내 것과 똑같았다.
그 집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지도를 열어
그 자리를 다시 확인했다.
스트리트뷰엔
몇 년 전 폐허로 남은 그 터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날,
우리가 서 있던 그 자리였다.
그 집은
이미 오래 전에 무너진 폐허였다.
그 위에
안개, 빛,
그리고
한때 우리 둘이 그렸던 미래의 모습이
잠깐, 겹쳐 보였던 거다.
지현이 나중에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짧았다.
“우리, 그날 진짜로 봤던 거 맞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사진을 다시 열었다.
그 자리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날 우리가 같은 마음으로 찍었던 미래는
그 사진 속에 또렷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마지막으로 겹쳐졌던 한순간의 착각처럼.
그리고, 이런 말이 있다.
제주 서쪽, 애월 쪽은
비가 그친 날,
안개가 낮게 깔리고
햇빛이 정면에서 퍼질 때
가끔, 오래전에 사라진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말이 있다.
허물어진 집이
멀쩡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몇 년 전에 떠난 사람이
동네길 끝자락을
그냥 걷고 있더라는 얘기도 있다.
“그날은 그냥,
눈으로만 보고
지나쳐야 하는 날이래.”
애월 살던 택시기사 아저씨가
조용히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괜히 남기려고 하지 말라고.
남지 않는 건,
이유가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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