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쌓이는 사이
제주에 살면
바다 친구도, 산 친구도 생길 줄 알았다.
도시보다 느리게,
조금은 따뜻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믿었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가장 외로운 건 ‘관계’였다.
처음엔 카페에서 말을 걸던 사장님,
옆집 반찬을 나눠주던 이웃이 반가웠다.
제주 사람들은 정이 많다더니,
역시 다르구나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그 친절은 호의였을 뿐,
쉽게 이어지는 관계는 아니었다.
“여기 분들은 가까워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요.”
이 말을 들었을 땐 낯설지 않았다.
내 경험이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누군가와 친해지기까지
여러 계절을 통과해야 했다.
한 번은
'제주 이주민 모임'이라는
밴드 커뮤니티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다들 외지에서 왔다고 했고,
겉으론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끼리라도 서로 의지가 되자"는 말이
분위기를 이끌었고,
그 말에 나도 살짝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달랐다.
각자의 사정, 각자의 생계, 각자의 피로.
하소연처럼 쏟아내는 말들 속엔
여유도, 공감도 부족했다.
결국, 우리 모두
버티고 있는 외지인이었다.
‘제주살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서로의 삶은 좀처럼 겹치지 않았다.
제주는 타지 사람들끼리 모이기도 쉽다.
비슷한 시기에 내려온 외지인들끼리
온라인 카페에서 만나고,
동네 시장이나 플리마켓에서 인사도 나눈다.
하지만 그 만남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는다.
서로의 삶이 제각각이고,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바빠지고,
그렇게 흐릿해진다.
한때는
일부러 사람을 만나러 나간 적도 있다.
동네 커뮤니티에 올라온 번개 모임에
용기 내어 참석했지만,
대부분은 어색한 인사 몇 마디로 끝이 났다.
친해지려는 마음보다는
각자의 고립을 잠깐 털어보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정착 2년 차쯤 되었을까.
드디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람
한 명이 생겼다.
함께 주짓수를 배우던 사람이었다.
처음엔 간단한 인사만 나누던 사이였지만,
스파링을 같이 하면서
조금씩 거리가 좁혀졌다.
기술을 알려주고,
서로 실수를 웃으며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말문이 열렸다.
훈련이 끝난 뒤엔
도장에서 땀을 식히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생겼고,
그게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됐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단 한 명이라도,
그런 사람이 생긴다는 건
큰 위로였다.
제주에선 혼자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처음엔 외로웠지만,
나중엔 그 고요 속에서
나를 더 잘 알게 되었다.
사람보다는 풍경과 가까워지고,
대화보다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관계의 밀도가 낮아질수록,
감각은 더 예민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사람이 필요하다.
아플 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을 때.
그럴 땐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바람 소리가 유난히 거세게 들리는 날엔,
그 친구의 웃음소리 하나로도
마음이 놓인다.
제주에서 친구를 만든다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느리게 쌓이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천천히 스며든 인연은
쉽게 흐려지지 않는다.
그 속도에 익숙해진 지금,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