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창 너머의 나

창에 드러난 낯선 얼굴

by 피터팬


제주 한경면 용수리.


숙소 창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해가 수평선 쪽으로 기울며 하늘은 붉게,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그 빛이 바다 위로 길게 번지며, 파도마다 부서져 반짝였다.

서쪽 노을은 유난히 강렬했다.


붉음이 퍼져나가다 어느 순간 보랏빛으로 물들며,

바닷가 공기까지 색칠하는 것 같았다.


짭조름한 바람이 창틈을 파고들어왔다.

나는 갑자기 몸이 근질거렸다.


“이 길을 달리면서 노을을 보고 싶다.”


말도 안 되게 들떴다.

마치 어릴 적 소풍 전날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운동화 끈을 질끈 묶었다.

발끝이 가볍게 튀었고,

심장이 달릴 준비를 먼저 해버린 듯 뛰었다.


해안도로에 나서자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바닷바람 속에는 짠내와 함께 오래된 해초 냄새가 섞여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드는 그 냄새가, 묘하게 설레게 했다.


나는 발걸음을 떼었다.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내 발소리와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리듬을 타듯 속도가 붙었다.

숨은 점점 가빠졌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벼워졌다.


노을빛이 내 옆을 달리며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길은 고요했다.

문 닫은 가게들이 줄줄이 이어졌고,

간판은 녹슬어 글씨가 반쯤 지워져 있었다.


바닷바람에 삐걱대는 소리가 허공에 가볍게 섞였다.

사람은 커녕 차 한 대도 지나지 않았다.


적막했지만,

그 적막조차 노을의 색감 속에서는

기묘하게 평화로웠다.


그러다.


도로 옆으로 낡은 건물이 하나 보였다.

간판에는 희미하게 ‘유성횟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문은 닫혀 있었고,

유리창은 소금기와 비에 얼룩져 뿌옇게 변해 있었다.


그 건물을 스쳐 지나던 순간이었다.

창에 내 모습이 비쳤다.

달리고 있는 나.


너무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순간 발걸음이 흔들렸다.


너무 빨리 지나쳐,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었다.


“내가 맞나?”


잠깐 스친 의문은 곧 파도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달리기를 이어갔다.


노을은 점점 더 짙게 물들고 있었다.

붉음은 보랏빛으로 넘어갔고,

바다는 어두운 비늘처럼 빛을 깔아앉히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달리는 길만 더 빨리 어두워졌다.


마치 그림자가 서둘러 내려앉는 듯,

발밑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가슴이 묘하게 조여왔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을 때,

다시 그 건물을 스쳐 지나게 되었다.


낡은 간판, 굳게 닫힌 철문,

그리고 바닷바람에 닳아 뿌옇게 변한 유리창.


나는 본능처럼 창을 바라봤다.


그리고

숨이 멎었다.


창 속에 달리는 건 분명 ‘나’였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아니었다.


내 얼굴은 땀에 젖어 일그러져 있었는데,
유리창에 반사된 얼굴은 씩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노을빛에 번져,
비정상적으로 길게 찢어져 올라가 있었다.


눈빛은 내가 가진 적 없는,
낯선 표정이었다.


게다가 발걸음은 나보다 반 박자 더 빨랐다.
앞질러 가며, 끌고 가듯 달리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불과 1초도 안 되는 눈길.


그러나 그 순간은
끝없이 늘어진 것처럼 내 몸이 얼어버렸다.


나는 그대로 유리창에서 눈을 떼고,
죽을 힘으로 숙소를 향해 달렸다.


바람은 얼굴을 찢듯 스쳤고,
노을빛은 점점 뒤로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면 그대로 따라올 것 같았다.
그래서 오직 앞만 바라보며 달릴 수밖에 없었다.


숙소 문을 닫고 들어왔을 때,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머릿속엔 여전히 그 얼굴이 각인되어 있었다.


내가 아닌 나.

소금기와 얼룩진 유리창 너머에서 웃고 있던,

붉은 노을빛 속의 그림자.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다시 공포로 굳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책에 수록될 괴담은 독자 여러분의 실제 경험,

전해들은 이야기, 혹은 오래된 전설 등

다양한 형태로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만의 괴담이 있다면 아래 주소로 보내주세요.

이메일: love1cm@hanmail.net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