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앞에서만 화해

고양이의 하품 하나에 둘 다 웃음을 터뜨린다.

by 피터팬


퇴사하고 나서부터

우리는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 있다.


출근하던 시절엔

싸워도 시간으로 덮였는데,

이제는 그게 안 된다.


냉장고 문 여는 소리,

전기포트 끓는 시간,

소파에 먼저 앉는 사람까지

전부 눈에 들어온다.


하루가 길어지니

감정도 길어진다.


오늘 싸움의 시작은

정말 별것 아니었다.


장을 누가 갔는지,

카드값이 왜 이 정도 나왔는지,

점심에 먹은 게 왜 또 배달이었는지.


말로 꺼내는 순간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데,

굳이 말을 붙이는 건

그냥 속을 긁고 싶어서다.


나도 알고

아내도 안다.


그래도 말은

튀어나온다.


퇴사한 사람은

시간에 쫓기지 않는 대신

쓸모없다는 기분과

계속 싸운다.


잉여가 된 나는

또 나름의 계산을 한다.


지금 이 집의 균형이

깨지면 안 된다는

압박 같은 것.


그 미묘한 감정들이

말 사이에 섞인다.


결국 대화는 엇나가고,

우리는 각자 휴대폰을 붙잡는다.


같은 집인데

다른 방에 있는 것처럼.


집 안이 조용해진다.


티비도 안 켠다.

괜히 물 마시는 소리만

크게 들린다.


이럴 때 먼저 말을 걸면

지는 것 같아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오늘 하루가

이대로 굳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때 고양이가 온다.


우리 싸움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소파 한가운데를 차지한다.


몸을 둥글게 말더니

갑자기 하품을 한다.


입을 한껏 벌리고,

턱이 빠질 것처럼.


그 느린 하품이

이상하게 웃기다.


너무 태평해서,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먼저 나온다.


참을 새도 없이.

아내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치고,

둘 다 또 웃는다.


방금 전까지

신경 쓰이던 말들이

갑자기 민망해진다.


고양이는 다시 눈을 감고,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옆에 앉아 있다.


말은 안 한다.

사과도 없다.

정리도 안 했다.


그런데도

싸움은 끝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이다.


이 집에서

매일 완벽한 대화를

할 수는 없다.


대신 이렇게라도

하루를 넘긴다.


요즘 우리의 화해는

늘 고양이를 통해서다.


직접 말하면

더 꼬일 것 같은 날,

고양이 앞에서는

그냥 웃고 만다.


고양이의 하품 하나에

오늘의 갈등을

덮어두기로

합의한 셈이다.


잉여남편과 퇴사아내의 하루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대단한 해결은 없지만,

내일을 망치지 않을

정도의 봉합.


말 대신 웃음으로

이어 붙인 하루.


이 정도면

지금 우리의 삶에

딱 맞는 화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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