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칼이 되는 날

쌓인 말이 터진다. “너는 왜 불안할 줄만 알아?”

by 피터팬


싸움의 시작은 정말 사소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내일 일정 이야기를 하다가였다.


“내일 은행 좀 들렀다 와야 해.”
와이프가 말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또?”


그 한 단어에

공기가 살짝 굳었다.


나는 그걸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요즘 돈 계산은

전부 와이프가 한다.


고정비, 카드값,

다음 달 빠져나갈 돈.


나는 묻기 전까지는

잘 모른다.


알아서 챙겨주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확인할 게 좀 있어서.”
와이프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요즘 너무 자주 확인하는 것 같아서.”


나는 그게

걱정처럼 들릴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피로였다.


와이프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음 달 일정,

빠듯한 구간,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한 대비.


설명은 길어졌고


나는

점점 말을 줄였다.


“좀 내려놔도 되는 거 아니야?”
“맨날 최악부터 생각하는 것 같아.”


여기까지는


아직

싸움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선이었다.


선을 넘은 건

그 다음이었다.


“너는 왜 불안할 줄만 알아?”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데는
정말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은
하루 종일,

아니 그 이후로도 남았다.


와이프는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표정이 먼저 굳었고
말은 한 박자 늦게 나왔다.


“불안해서 하는 게 아니라,
혼자 책임지고 있으니까 확인하는 거야.”


그 말이

나를 더 조용하게 만들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의 말다툼은

짧았다.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고,
“그럼 내가 뭘 하면 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각자 다른 방으로 흩어졌고
싸움은

그렇게 끝났다.


문제는

그 뒤였다.


설거지를 하다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계속 그 장면이 떠올랐다.


은행 얘기가 아니라,
돈 얘기도 아니라,
그 말 한 문장 때문이었다.


너는 왜

불안할 줄만 안다고.


와이프의 불안은

성격이 아니었다.


내가 내려놓은 계산들,
내가 묻지 않았던 숫자들,
혼자 정리해온 책임의 결과였다.


그걸 한 단어로

정리해버린 건


너무 쉬웠고
그래서

더 잔인했다.


말은

가끔 칼이 된다.


의도하지 않아도,


상대를 규정하는 순간
이미

베어버린다.


싸움은 짧았지만
여운이 길었던 이유는

그거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말보다

늦게 이해했고,


와이프는 말보다

먼저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게


그날 싸움의

진짜 이유였다.







keyword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