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남추녀 May 13. 2016

은하수를 뛰어넘는 긴 여행을 떠나 보기로

류예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그 시절 좋아하던 남자애가 있었다. 설익은 풋사과를 한 입 베어 먹을 때의 느낌을 안겨주던 아이. 그는 2반 남학생이었다. 


2반 남학생이 생일 선물을 주겠다고, 집 앞까지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엄마가 플래시를 들고 골목길 너머 큰길로 나오기 전까지, 중학생 주제에 우리는 겁도 없이 제법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충 그런 대화가 오갔던 것 같다. 교환 일기를 쓰자, 방과 후 모둠 활동은 재밌니? 그런데 말이야. 너 왜 그 아이랑 그렇게 친한 건데, 글로는 차마 담기 힘든 유치 찬란한 말들.


확실한 건 2반 남학생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법 어른스럽게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 속으로 유월의 아카시아 향기가 짙게 퍼져 나갔다. 가끔 불빛을 단 자동차들이 빨갛게 달아오른 소년, 소녀의 뺨을 유유히 비추며 지나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대화를 이어나가던 중, 불시에 엄마를 대면한 남학생은 쭈뼛쭈뼛 인사를 한 후, 타고 온 오토바이를 타고 부르릉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어른이 된 2반 남학생이 섬 마을 아가씨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려주던 그 날은 설 연휴였다. 경상도 남자애가 어떻게 전라도 여자애를 만나게 된 건지. 삶은 정말 미스터리한 것 투성이다. 아무튼,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2반 남학생은 집까지 바래 주겠다고 했고, 그렇게, 운전대를 잡은 남학생이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쳐 나갈 때만 해도, 모든 것이 더할 수 없이 평화로웠다. 적어도 그 순간엔 그렇다고 느꼈다. 그가, 그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사진 @ 손구용


“집에 가기 전에 말이야, 우리 동네 잠깐 구경하고 갈래?”

“응. 좋아.”


실은 좋다고 말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단 한 번도 남학생의 동네에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남학생이 운전하는 자동차가 그가 살던 동네로 진입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렇게 가까웠구나. 


-저기가, 우리 집.


그렇게 자신의 집 앞을 지나,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좁은 샛길을 달려가던 그 밤을 잊지 못한다.


“혹시 기억하냐? 중학교 2학년 때 말이야. 내가 너한테 생일 선물 준다고 집 앞까지 찾아갔었던 거.”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르고 키가 컸던 15살 소년은 수년이 지난 후 마르고 키가 큰 29살의 어른이 되었다.



오토바이 타고 말이야. 이길 따라갔었다.

무심히 건너오는 한 마디.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저 한 마디를 위해, 그가 마치 아주 먼 별에서 은하수를 타고 여기까지 건너온 것만 같았다. 그 시절이 지난 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그 사이 나는 내내 소중한 것을 놓친 것만 같은 기분으로 살아왔다. 서로 달랐던 인생에서 공평하게 주어진 건, 서른이라는 나이였다. 우리는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 별이 무진장 많이 떠 있었는데.

훅, 하고 사고처럼 끼어드는 말,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설마, 쑥스러워서?

아니, 벅차올라서.

생각해보라. 그런 말을 듣는다면,

필시, 어느 누구라도 설렘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로맨스는 쿵쾅거리는 설렘으로 시작해,

찌르륵거리는 실연의 감정으로 끝나는 법.


15살의 나는,

2반 남학생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법 어른스럽게 자각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2반 남학생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나를 ‘실연’의 감정에 간단히 빠뜨려 버렸다. 

나는, 그 한 마디에 무릎을 꿇어버리고야 말았다.


별빛이 쏟아지던 밤, 오토바이를 타고 시골길을 달려가던 소년 때문에.

바짝 깎은 머리, 귀 밑으로 송골송골 흘러내리던 땀을 소매 끝으로 훔쳐댔을 소년,

티셔츠의 등 부분은 아마 흠뻑 젖지 않았을까.

집으로 돌아가던 길은, 

내게로 달려오던 그 길보다 더 멀지 않았을까 싶어

할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타임 슬립해 까까머리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거듭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실패한 여행을 완성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그와 헤어지고 난 후,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다짐했다. 


잊어보기로,

다시 한 번 은하수를 뛰어넘는 긴 여행을 떠나 보기로.

이전 15화 섬광처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