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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Jul 18. 2015

Cheer, Beer

 류예지

-이런 상황엔 소주가 어울리지 않나요?


K가 물었다. 그녀의 입에서 싸한 알코올 냄새가 번졌다. 공기를 비틀고 전해져 오는 맥주의 냄새. 


-왜요?

-오늘 차였다고 하는 사람이 다른 술도 아닌 맥주를 마시니까. 


콧등을 찡그리며 웃는 K에게 대뜸 질문을 한다. 


-소주와 맥주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요?


턱을 괴며 잠시 골몰한 K가 대답을 이어간다. 


-음… 술이라는 거?


노멀한 대답이다.


-그 것도 이를 테면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나는 K의 반응을 부러 살핀다. 맥주의 기운이 오른 볼과 눈꺼풀이 빨갛다. 대답을 유예하려는 듯이 입술만 오물오물. 


-취한다는 거요. 그냥 단지 이 상황을 조금 느리게 진행시키고 싶을 뿐이에요. 나, 소주엔 금방 취해버리고 말거든요. 조금씩, 조금씩 아껴가며 취하고 싶어서….


K가 웃는다. 그러고는 나직이 중얼거리는 말, 귀여워. 그러고는 손을 들어 S를 부른다. 


-기네스로 두 병만 더 줘. 엄청 시원한 걸로. 


K의 손짓을 지켜보고 있다. 저런 모습이라고 했다. 형이 K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몸짓, 같은 거 말이다.


-일본 속담 중에 ‘정말 맛있는 물은 그 물을 마실 때 자신에게 위가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는 말이 있대요.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시원하게 마시는 맥주 한 모금에 오늘 내게도 목구멍이 있음을 새삼 실감하고 있는 중이라고나 할까요?


K가 어깨를 움츠리며 후후훗, 웃는다. 


-그런 멋진 말을 알고 있으면서, 왜 그 사람한테 제대로 말하지 못했어요?


나 역시 조금 흐트러진다. 사실, 맥주도 술인지라 많이 마시면 취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맞은편에 앉은 K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이마 언저리에 선명하게 남은 흉터. K의 쌍둥이 동생이자, 형의 절친한 친구였던 S가 말했다. 어찌할 틈도 없이 머리를 벽에 찍었다고. 


교통사고로 2년 전에 죽은 나의 형. 내 형의 아내가 될 뻔한 K와 나는 일 년 만에 S가 운영하는 호프집에서 재회했다. 상처는 별 모양으로, K의 이마에 남아 있다. 


-N은 그 말만은 말아주길 바랐어요. 제대로 고백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죠. 슬픈 표정을 지었거든. 그 얼굴을 보니 괜히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았어. 상처 주고 싶지 않았어요.


N은 친구로 남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안주로 나온 오코노미야키를 뒤적거린다. 이미 식은 지 오래, 우리는 지금 맥주에 탐닉하고 있다.


-헤겔 알죠? 헤겔이 자신의 연인인 횔덜린에게 이런 말을 남겼대요.


사진 @ 손구용


K가 천천히 말문을 연다. 술기운 탓일까. 목소리가 떨린다. 나는 어쩌면 오늘 밤 이후로 K를 다시는 만나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죽기 전에 내 심장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심장을 상상만 하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나는 아네.


K가 기네스의 뚜껑을 연다. 겨울의 입김처럼 메마르고, 망자의 혼 같은 한기가 불쑥 빠져나온다.

 

-형을 만나는 동안, 나는 내내 상상만 하던 심장을 본 것 같았어요. 붉디붉은 심장. 그 사람이 들려줬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이렇게 살아있는 걸요.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요. 

포기는 김장할 때나 쓰는 말이니까. 알았죠?


K는 내게 맥주를 권하며 낮게 읊조렸다. 


-Cheer, beer!


맥주는 술술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갔다. 몇 병째인지도 모를 맥주병이 수북하게 쌓였을 때 나는 움츠리고 있던 가슴을 폈다. 정신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그러한데도 상관없었다. 


나는 스마트폰의 액정을 터치했다. 그러고는 통화 버튼을 길게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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