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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Oct 31. 2015

멜로드라마를 좋아하는 내 남자친구

류예지

내 남자친구는 멜로드라마를 정말 좋아한다. 나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다. 내 남자친구가 멜로드라마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모르는 나만 아는 비밀로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우리가 처음으로 모텔을 갔을 때였다. 섹스를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순전히 잠을 자기 위해서였다. 그 날 커플이 되고 나면 으레 거쳐야 하는 공식적인 술자리가 길어졌고, 사이좋게 컨디션이 나빴던 우리는 술 한 잔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친구들의 온갖 주사를 받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에 억울함을 느껴 몰래 도망치기로 합의를 봤다. 
네온사인이 명멸하는 새벽, 11월의 추위가 무겁게 가라앉은 거리에서 우리는 지친 얼굴로 마주 섰다.


-아,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어. 이런 날은 정말… 겨울잠이라도 자고 싶은 심정이야.

-내 친구들 너무 드세지? 미안. 사실 나도 하품에 잡아먹힐 것처럼 피곤해.

-어쩌지?

-어쩌긴. 자러 가자. 


피곤이 잔뜩 묻어난 얼굴로 코트 깃에 얼굴을 묻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자러 가자. 온갖 현란한 말솜씨로 나를 구워 삼았다면 어림없는 소리라고 못 박았을 것이다. 

-지금 들어가면 엄마한테 혼나겠지?

-당연하지. 더구나 이 시간에 택시 타면 할증 붙어서 비쌀 테니까, 그 돈으로 모텔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날씨도 춥고, 정말 지치기도 했고. 그리고 네 이름을 걸고 맹세컨데, 딴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날 믿으라고.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겠어.
-너무해.  


그의 눈빛이 일순 가늘게 찢어지는  듯했으나, 우리가 불가피하게 섹스를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말처럼 너무 피곤했다. 어디든 따뜻한 곳에서 언 몸을 녹이고 싶었다. 
   
요즘 모텔은 말이 모텔이지, 호텔에 버금갈 만큼 고급스럽다. 복도에 붉은 융단은 기본이고, 실내 장식 또한 깔끔하고 정갈하기 이를 데 없다. 문을 연 순간, 포근해 보이는 침대와 은은한 조도의 불빛 때문이었을까, 피곤함이 물밀듯이 눈자위로 스며 들어왔다. 오랜 시간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탓에 잔뜩 경직되어 있던 발을 푹신한 침대 위에 묻었다. 


코트를 벗은 그가 어색한 기운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인지 눈 좀 붙이라고 순수 그 자체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고단했던 나는 그가 씻고 나오기도 전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낮은 톤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비몽사몽 간에 텔레비전을 켜두고 잠이 든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내 옆에는 푹신한 베개만이 겹겹이 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남자친구는? 



사진 @ 손구용


   
커다란 방에 나를 버려두고 홀로 사라진 줄 알았던 남자친구는 커다란 프로젝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그가 야한 케이블 채널을 보며 이상한 짓을 하고 있기를 바랐던 건 아니지만, 그간의 행동이 무색하게 단정하고 모범적으로 텔레비전을 보는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본능에 충실한 이드적 인간이었다. 사귄지 이틀 만에 길거리에서 진한 프렌치 키스를 시도해 왔고, 성인용 세헤라자드라고 착각할 만큼 야한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사는 데다, 평소 장소불문 스킨십을 시도해와 빈축을 사기 일쑤였다. 색마, 변태라고 양껏 놀려댔지만 그의 행동이 싫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의 시선, 몸짓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나는 그에게 이미 길들여지고 있었다.


그는 사 년 전 소수 마니아층에서 사랑받았던 멜로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보고 있었다. 더군다나,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찍어대기까지 했다. 나도 즐겨봤던 드라마라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줄거리는 훤히 꿰뚫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마지막에 죽었네, 살았네를 두고 말이 많았던 작품이었다. 어쨌든 수백 개의 채널 중에서 하필이면 멜로드라마를 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찍어대는 모습이 나로서는 잘 믿기지 않았다.  
 

-맙소사.
나는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피곤으로 갈라진 목소리가 조각조각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깬 거야? 미안. 

그는 티슈를 뽑더니 채 마르지 않은 눈가의 눈물을 닦아댔다. 
-그 정도였어?
그의 행동이 주책 맞아 보였기 보다는 어쩐지 드라마를 보면서 우는 남자 친구의 얼굴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잘 우는 남자는 싫다. 그러나 우는 법을 모르는 남자 역시 싫다. 어쨌든 이상하다. 왜 이 사람한테만큼은 예외를 두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두 번째로 모텔에 왔다. 그는 여전히 드라마 채널에 시선을 꽂은 채 멍하니 앉아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 옆엔 내가 있다는 것. 우리는 맥주와 오징어를 입에 문채로 드라마의 줄거리에 대해 심오하게 이야기 중이다. 나는 멜로드라마를 시청 중인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어떤 글에서 말이야.
-응.
-이런 구절이 있었어.
-뭔데?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듯 보여도, 그는 단 한 번도 내 말을 허투루 들은 적이 없다. 

-우리가 한 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두 개의 몸이어서 좋아. 이렇게 껴안을 수도 있으니까.


그가 목이 탄 듯 벌컥 벌컥 마시던 캔 맥주에서 입을 떼며 물었다.


-넌 우리가 한 몸이었으면 좋겠어?


나는 오래전부터 생각해두었던 말인 듯 대답했다. 


-아니. 두 개의 몸이어서 좋아.

-왜?
-사랑하다가, 헤어질 수 있으니까.


순간 텔레비전을 향해 있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그의 눈가가 심장 박동수만큼이나 빨리 파르르 떨리고 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우리의 사랑이 언젠가 텔레비전 속 멜로드라마로 그친다고 해도.

-그러한대도?
-우리는 지금, 바로 이곳에 함께 있잖아. 


우리의 만남이 결과가 뻔한 멜로드라마의 수순을 밟는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 이렇게 함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냐고, 멜로드라마를 좋아하는 남자 친구에게 나직이 속삭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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