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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Sep 05. 2015

섬광처럼

류예지

스쿨버스 안, 빈자리가 드문드문 있었지만 그녀의 옆자리로 다가간 것은 알 수 없는 이끌림 때문이었다. 그녀가 혼자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이를 테면 ‘발견’이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아르키메데스의 '부력' 같은. 백팩을 짐칸에 올리고 난 후 헛기침을 여러 번 했지만 창밖에 머문 그녀의 시선은 정지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더 용기를 냈다. 가진 건 젊음과 객기뿐이었으므로.


"안녕하세요, 교수님. 교수님의 시 창작 수업을 듣는 학생인데요, 그러니까 제 이름이…."


그녀는 경계하는 듯한 표정으로 흘긋 쳐다보더니 입을 뗐다. 


“아, 그래요?”

아, 그래요, 를 끝으로 침묵.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기에 이내 머쓱해졌다. 내게 머문 시선을 찬찬히 거두어 가던 그녀는 커튼이 반쯤 드리워진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으니 조용히 있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사인을 보내는 듯했다. 고집스레 다문 입술, 내가 앉은 후부터 더욱 틀어진 몸의 각도, 창밖에 고정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뭐, 아무렴 어때. 아쉬운 대로 건너편 자리에 앉아 은은한 샴푸 냄새를 풍기고 있는 여학생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즈음 요금정산을 마친 스쿨버스는 교정을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간헐적으로 깊은 숨소리를 냈고, 그때마다 손가락으로 더욱 세게 커튼을 움켜쥐었다.


버스 안은 고요했다. 


하루 종일 기분이 처져 있다가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매일같이 부드러운 바람과 달짝지근한 햇볕이 비춰 들었고  그때마다 멀쩡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수런거렸다. 술 한잔 하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오른 건 무언가를 감당해낼 자신이 없는 이유에서였다. 


버스 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졸거나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었다. 여러 차례 눈을 감았다 떴지만 잠마저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먼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무슨 말이든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심한 반응이 섭섭했다. 강의실을 벗어나 처음 만난 자리인 만큼 사적인 이야기 내지는 내가 갖고 있는 진로에 대한 고민을 조금쯤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옆자리에 앉은 것이 후회되었다. 


사실 그녀는 수업 이외에는 학생들과 친분을 쌓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수업 중에도 같은 사람의 이름을 표정 변화 없이 거듭 물어보는 실수를 저지르는 탓에 '망각의 조각상'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내내 앞좌석의 의자 등받이만 쳐다보고 있던 시선을 그녀를 따라 창밖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휙휙 소리를 내며 스쳐지나 가는 풍경 따위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지 그녀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체구는 작았다. 블라우스를 따라 가슴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햇볕을 닮은 따뜻한 속눈썹, 그와는 대조적으로 강한 인상을 주는 날렵한 콧대. 포근한 쿠션을 배고 단잠이 들 때와 같은 편안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녀 앞에서만큼은 굳이 과장된 말투로 어색한 상황을 누그러뜨릴 가십거리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될  듯했다. 나는 그런 관계에 넌덜머리를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침묵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손구용


"광합성하기 좋은 날이죠?” 

갑작스러운 반격이었다.


"네?!"

“이 순간을 즐겨요, 손태희 군.”


그녀에게 노출되어 있던 눈빛, 나는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닫은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한줄기 빛나는 섬광 같은. 볼에서부터 귀까지 빨개졌다. 동시에 군대 제대 이후 내내 잠잠하던 왼쪽 가슴이 뜨거운 펌프질을 시작했다. 


그녀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향해 분홍빛 입술을 말아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와 나를 둘러싼 공기가 점차적으로 맑아지고 있었다. 무방비로 벌어진 입술, 황홀한 순간을 만끽할 새도 없이 또 다시 시작된 침묵. 솨솨 하는 바람 소리가 귓가에서 멈추지 않았다. 숨이 가빴다. 


그 순간에도 버스는, 시속 팔십 킬로미터의 속도로 환한 햇볕 속을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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