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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Aug 29. 2015

랄리구라스

류예지

네팔의 카투만두에서 타투이스트로 일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눈이 맑은 어린 여자 아이와 동행한 한 여자가 가게의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펀자비드레스를 걸치고 있었지만 한 눈에 한국인임을 알 수 있었다. 오랜 방랑벽으로 한국을 떠나 인도를 떠돌고 있는 나였지만, 일본인 특유의 엷은 선이나 중국인 특유의 수다스러움을 찾아볼 수 없는, 어느 중간쯤의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에게서 단번에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녀의 손을 놓칠세라 꼭 쥐고 있는 여자 아이는 짐작하건대 열 살쯤 됨직해 보였다. 여자는 '나마스떼'라는 말과 함께 정중하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안녕하세요'라고 맞받았다. 늘 다니던 익숙한 공간에서 무심코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잔뜩 경직되어 있던 여자는 익숙한 한국말에 경계심을 푼 듯했다. 여자의 검은 동공 속에는 구리 빛으로 적당히 그을린 내가 투영되어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내민 건, 네팔의 국화인 랄리구라스였다. 그러고는 이 꽃의 문양을 자신의 몸에 새기고 싶다고 나직이 말했다. 


"당신의 아이인가요?"


여자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아이의 검은 머리 결을 쓰다듬었다. 순수하고 고결한 대상을 어루만지듯. 아이는 순간, 몸을 떨었다. 오랜 시간 체득한 본능적인 제스처인  듯했다. 그 눈에는 신기한 일이지만 내가 없었다. 심연의 빗장을 걸어놓은 그 눈은 아무것도 투과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아인,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어요."

   

여자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차도르를 벗으며 말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아이의 두 눈은 한국을 떠나기 직전 들렀던 망상해수욕장에서 본 시퍼런 푸른 빛깔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다는 건 일종의 죄악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악인지 세상을 살다 보면 불투명한 경계 속으로 침몰되어 버리는 것들이 있다.

  

잔뜩 움츠려 들었던 아이는 곧 나의 손길에서 따스함을 느꼈는지 경계심을 풀었다. 

   

"밑그림을 그려야 하니까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랄리구라스를 새겨 달라고 하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거든요."


"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이 아이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이 맘에 들었어요. 언제쯤이면 될까요?"


사진 @ 손구용



문득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음성이 되살아났다. 2년 전 떠나간 그녀였다. 돌아오면 랄리구라스를 새기고 싶어, 간편한 짐을 꾸린 그녀는 천진한 얼굴로 말했다.


-길어야, 세 달. 기다려줄 수 있지?

 

나는 그녀를 믿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눈을 가졌으므로. 나는 왜 가야만 하는지에 대해 구질구질하게 묻지 않았다. 


-돌아오면 타지마할을 보러 가자.

   

단지 그렇게 답했을 뿐이다. 그녀는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나 내 밑그림이 채 완성되기 전에 떠난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우리에겐 약속된 미래 같은 건 없었다. 


"왜 문신을 하려고 하죠?"

   

나는 문신을 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묻는다. 문신은 한번 새기면, 지워지지 않는다. 상처처럼. 일종의 의뢰인과 타투이스트로써의 마지막 협상인 셈이다.  


"인도의 바라나시에 가면 엘비스 호텔이라는 곳이 있어요. 주인 아저씨가 엘비스를 너무 좋아해서 붙인 이름인데, 그 곳에서 만났던 한 승려가 아이를 보고, 랄리구라스를 닮았다고 했죠.  그때 난 그 호텔에서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운명을 읽어나 봐요, 그 사람. 이번 생에 이 아이를 힘들게 하면, 다음 생에도 이 아이에게 고통을 안겨줄거라 했어요. 그래도 좋겠느냐고 했죠."


그즈음 여자는 눈을 돌려, 카트만두 시가지를 고요히 쓸어내리는 붉은 석양을 바라보았다. 


"내가 흐느꼈어요. 침묵으로. 그런데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이 아이가 내 흐느낌에 맞춰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어요. 신기한 일이었지요. 손의 떨림만으로도 아픔을 느끼는  듯했으니까요. 그래요. 이 아이는 내 일부였던 거예요. 심장처럼 내 안에서 팔딱거리고 있다가도 광활한 우주처럼 멀어져 나를 낯설게 만들었죠. 그래서 내 안에 붉은 빛으로 영원히 남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게 내가 이 아이에게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아니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았으니까요."


어떻게 그녀가 이곳까지 흘러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내가 인도 여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 묵었던 엘비스 호텔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사실 살다 보면 손에 꼽히는 기이한 운명적 기운을 맛보지 않는가 말이다. 이를테면 나는 그 여자에게서 그녀에게 듣고 싶었던 답변을 얻은 셈이었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랄리구라스를 새겼다. 여자의 목덜미는 랄리구라스의 붉은 빛으로 고요히 물들어갔다. 나는 모든 기운 혹은 가능성을 소진했다. 그러나 더 할 수 없이 가뿐했다. 랄리구라스를 끝으로 타투이스트로써의 삶을 접었다. 그리고 그녀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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