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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Aug 23. 2015

소녀에게 시골을 빼앗을 수는 없다

류예지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자 희붐한 구름 아래로 도시의 시가지가 드러났다. 바다, 숲, 그리고 초고층빌딩들. 매일매일 그녀가 익숙하게 바라본 풍경이었을 것이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그녀가 누누이 말하던 후텁한 도시의 기운이 현실처럼 와 닿았다. 


공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겨우 붙잡아 그녀가 남자 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있는 구역으로 가달라고 더듬더듬 말했다. 핸들을 잡은 운전기사는 남방인 특유의 마르고 걍팍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무언가 말을 걸고 싶은 눈치였지만, 나는 차창을 때리는 빗방울을 향해 시선을 가져가는 것으로 이방인에게 보이는 단순한 호기심에는 응하지 않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아열대림이 우거진 풍경을 제외하곤 내가 떠나온 도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도시 곳곳에 숲 조성이 잘 되어 있어, 언제든 원할 때마다 푸른 나무와 숲을 볼 수 있다는 게 이 도시가 가진 장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나를 그녀의 둘도 없는 친한 동생으로 알고 있다. 기실 그 말이 맞기도 했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한 살 터울의 선후배 사이였다. 재학 중이던 여자고등학교는 지방의 소도시에 있었다. 그 지역의 이름을 딴 여고로, 해당 지역에 소속된 면 단위의 중학생들이 시험을 치러 일정 커트라인을 넘겨야만 입학의 조건이 주어지는 곳이었다. 그녀는 전교에서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모범생이었고, 나는 공부는 중하위권이었지만 인근 지역에서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를 통해 전교생에게 이름 정도는 알려진 문학소녀였다. 

그녀와 내가 만난 것은 상담실 입구에서였다. 정확히는 상담을 끝내고 나오던 그녀와 부딪혔고, 나는 그녀의 눈에서 얼비치는 냉소를 읽었다. 그러고는 겁도 없이 그 눈을 한참 동안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뭐야? 하는 표정으로 불쾌하다는 듯, 한편으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 눈빛에 반응했다. 그때 알아챌 수 있었다. 방금까지 상담실을 채우고 있던 공기의 질감, 커튼이 처진 낡은 창문 틈으로 비쳐 드는 햇살, 안경을 끌어올리며 차트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던 상담 선생님의 굳은 이마. 그것은 그녀가 어쩌면 나와 비슷한 부류일지도 모르겠다는 동질감이었다. 그런 그녀가 2학년 야간 자율학습 장소인 도서관으로 부른 것은 토요일 방과 후의 일이었다. 


교실 문이 벌컥 열리며, 내 이름을 부르던 친구의 얼굴을 어제의 일처럼 기억한다. 영문도 모른 채 도서관 앞까지 불려 나간 나는 슬리퍼 앞으로 비어져 나온 애먼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귓불이 붉어졌을 것이다. 

-의자매 맺고 싶어서. 어려운 점 있으면 말해. 그래, 참고서 같은 게 좋겠다. 의자매들은 서로서로 그런 걸 공유하니까. 가끔 밥이라도 먹자. 떡볶이 좋아해?

그녀는 나의 거절 같은 건 애초에 염두하지 않은 듯했다. 단 한 번도 성취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마음 써본 적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녀에게 있어 나란 존재도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어물어물 고개만 끄덕거렸다. 


의자매를 맺었다는 소식은 우리 학년에서만큼은 이슈거리였다. 그녀와 의자매를 맺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의자매는 주로 선배들의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학교에는 예쁘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혹은 친해지고 싶은 후배를 만났을 때 의자매를 맺는 전통이 있었다. 간택당했어?라는 말은 그 시절 우리가 즐겨 사용하던 은어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따금 휴게실에서 만나 코코아나 밀크티를 나누어 마시며 미래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그때마다 서울로 가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좁아터진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게 어디라도 상관없어. 그래도 이왕이면 서울이면 좋겠지. 넌, 글을 잘 쓰니까 여러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을 거야. 내가 도와줄게. 

글 쓰기를 좋아했지만 단 한 번도 어떤 목표를 위해 써본 적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저 느끼는 것을 자연스럽게 글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서울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도착했어? 
-아직. 
-그 사람이 집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오늘 반차까지 내면서 수선을 떨더라.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사람은 널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 누군가의 관심이나 배려에 익숙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늘 이런 식이었다. 도시로 떠난 후, 그녀는 자신의 곁에 누군가를 두면서도 늘 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곁으로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를 따라 서울로 향했고, 이십 대의 대부분을 그녀의 공간에서 함께했다. 그녀가 좁은 반지하에서 번듯한 오피스텔을 얻을 때까지, 그리고 이국의 도시에 지금의 아파트에 자리를 잡기 전까지 말이다.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다. 수능이 끝난 후의 주말, 그녀는 룸메이트들이 집으로 돌아간 틈을 타 기숙사로 나를 불렀다. 부모님께는 직접 전화를 걸어 허락을 구했다. 그날 우린 난생처음으로 함께 잠을 잤다. 이렇다 할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녀는 예상했던 대로 시험을 잘 봤고, 이변이 없는 한 장밋빛 미래를 약속받을 터였다. 그녀는 여리디 여린 자신의 팔을 내주었다. 가끔 꿈결처럼 머리를 쓰다듬거나 목덜미의 냄새를 맡기 위해 다가왔다. 그뿐이었다. 


사진 @ 손구용


-아이를 가졌어.


잘 다니던 외국계 회사를 그만두고 떠난 지 사 년 만의 일이었다. 그 사이 내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다행히 말에 진심을, 표정에 영혼을 담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한번 방문하지 않을래? 

그녀의 임신이 믿기지 않았지만 한 번쯤 그 완강하게 부푼 배를 만져보고 싶었다. 그렇게 감행한 여행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도 똑같이 말했다. 둘도 없이 친한 언니를 만나고 오겠다고. 그 사람은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앞에 내렸을 때 키가 185cm쯤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의 외국인이 친근하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국의 풍경 속에서 성큼성큼 걸어온 사람이었다. 선하고 깊은 갈색 눈빛, 나는 단번에 그녀의 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Are you Mi-so?
-Yes I'am. my name is Mi-so. 

-I
t's good to see you. 내 이름은 레오. Soo-ah's husband. 

그는 왼쪽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한국말을 곧잘 했다. 그는 캐리어의 손잡이를 받아 들며 묻지도 않은 말을 이어나갔다. 수아가 얼마나 아름다운 여자인지, 그리고 그녀의 부풀어 오른 아랫배가 얼마나 귀여운지, 그 뱃속에서 아이가 얼마나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지, 그리고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우리 둘의 우정을 얼마나 부러워하고 있는지, 퇴근 중인 그녀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는 마치 자신의 일상으로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미소, This wonderful evening will be with us. 기대해!


남자는 유쾌하게 미소를 지었다. 문득, 수아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보스턴과 뉴욕을 거쳐,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십 년이 넘었어. 고향은 오클라호마야. 미국 동부의 작은 시골 도시지. 그래서 그런지 사람이 참 진국이야.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시골 출신이구나. 

-응. 그렇지. 그렇게 되는 건가? 

나는 선한 눈빛만큼이나 솔직하게 곧은 등을 바라보며 천천히 이국의 낯선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여름의 끝을 알리는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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