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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Sep 20. 2015

미스터 탬버린 맨

류예지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걸 실수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리움이 입 안 가득 차서, 찰랑거렸다. 그래서 쏟아버리고 싶었다.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말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후회하지 않았으나 우리를 둘러싼 수묵화 같은 침묵에 조금 눈물이 났다. 대화의 말미에 당신의 근황에 대해서 묻자, 하필이면 잘 지내지 못한다고 했다.    




내가 자전거를 처음 배웠던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세상의 딸들이 그러하듯 아버지를 통해서였다. 아버지는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으슥한 분위기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아버지의 배려 안에서 수 없이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전거를 가르쳐 주는 일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무릎에 시퍼런 멍이 들던 말던, 두려움에 떨던 말던, 아버지는 이 일만은 당신이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지, 엄마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버지는  그때 몸이 많이 아프셨다. 아버지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누렇게 변색되어 갔다. 그래서 환한 낮이 아닌, 해가 다진 운동장에서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리라. 내가 건강한 사춘기 소녀로 자라나는 것에 반비례해 아버지는 하루하루 더 야위어 갔다.       


결국 아버지는 내가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고, 이제 막 풋사랑을 경험하고 있던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발인이 끝난 다음 날, 나는 먼지가 뿌옇게 쌓인 자전거를 타고 내가 살고 있던 면에서 두 개의 면을 지나친 곳까지 달렸다.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자전거를 타고 세상의 어디까지 갈 수 있나 궁금했던 것 같다. 자전거를 타고,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잦아들었을 때쯤이야 알 수 있게 됐다. 내가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낯선 곳까지 와 버린 진짜 이유에 대해.        


물론 그 날 나는 학교를 가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집으로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남자 친구를 자처하고 있던 2반 소년도 하루 종일 나의 안부가 궁금했을 것이다. 물론, 엄마는 동네를 이 잡듯 쑤시고 다녔을 것이다.    

 

낯선 동네의 처음 보는 풍경들은 도무지 무섭지 않았다. 엄마의 불같은 화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세상에서 없었다. 나는 해가 지고 어두컴컴해져서야 동네의 어귀에 닿을 수 있었다. 어차피 갈 데도 없었다. 배도 고팠다. 멀리서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집으로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어두움 속에 우두커니 서서 노오란 알전구처럼 빛을 뿜고 있던 집집마다의 따스한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패잔병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던 엄마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일그러진 입술, 흐트러진 머리, 쑥 들어간 볼, 눈물로 어룽진 눈. 그러나 엄마는 차분한 말투로 밥을 먹자고만 하셨다. 나는 한상 가득 차려진 밥을 먹고, 씻지도 않은 채 잠이 들었다.      


  



당신에게 걸었던 전화가 끊겼다. 나의 의지였는지 당신의 의지였는지, 어차피 상관없게 됐다. 고적한 밤이면 나는 당신이 내게 선물했던 밥 딜런의 시디를 듣곤 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미스터 탬버린 맨’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밥 딜런에 대해 알지 못한다.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가 아주 먼 이국에서 사람들의 영혼에 관해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뿐이다. 왜 하필이면, 자전거를 타고 짧은 여행을 갔던  그 날의 일이 떠올랐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당신과 전화를 끊고 나는  그 시간 속으로 돌아가 있었다. 슬픔과 불빛. 나는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잠을 잔 이후 그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어딘가에 봉인시켜 버린 것이다. 잡힐 듯 말 듯 그러나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슬픔 속으로 어느덧 나는 한걸음 다가가 있었다.      



사진 @ 손구용


하지만 슬픔은 저만치에서 가늘고 여린 손목으로 손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당신과 늘 닿아있다고 생각했던 날들로부터 나는 너무나 멀어진 것을 깨닫게 됐다. 이제 나는 당신의 번호를 그때처럼 잊어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순간에도 밥 딜런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기, 미스터 탬버린 아저씨, 나를 위해 노래를 해주세요.      


난 잠도 안 오고 갈 데도 없지요.      


저기, 미스터 탬버린 아저씨, 나를 위해 노래를 해주세요.      


부산한 아침이 오면, 나는 당신을 따라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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