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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Aug 15. 2015

납량특집: 눈을 떠야 할 시간

류예지

그의 등에는 한 마리의 자그마한 나비 문신이 새겨져 있다. 함께 있지 못한 시간 동안 몸 구석구석엔 내가 알지 못하는 변화가 생긴  듯했다. 길었던 머리가 짧아졌고, 푸처럼 나왔던 똥배도 쏘옥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왼쪽 귓바퀴에 있던 점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왜 하필이면 나비였어?

-당신은 불멸의 꽃이었으니까.


닭살스러운 멘트를 날리며 황톳빛 메마른 사막 같은 등을 보이는 그. 가는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 걸로 보아 이제 막 안온한 잠 속으로 빠져드려는 순간인 것 같았다.  


-등을 보이지 말아 줘.   

-왜, 어둠 속에서도 등을 돌리는 게 보여? 

 

그의 말끝에 끈끈 한잠의 기운이 묻어있다.    


-당신, 불을 끄고 난 직 후엔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아, 아니면 떠?  

-본능적으로 눈을 꼭 감아버려. 난 겁이 많은 편이니까. 수영을 처음 배웠던 게 아마 고2 때였을 거야. 처음으로 입수라는 걸 했는데 너무 무서워서 눈을 못 뜨겠더라고. 강사 선생님이 눈을 꼭 감고 있는 내 엉덩이를 철썩 때리시면서 그러는 거야. 두려움을 버리고 눈을 떠야 한다고. 그래야 비로소 물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라고.  

-그래서, 물속에서 눈을 떴니?  

-응. 처음에는 무척 어려웠지만 그다음은 구구단의 5단을 외우는 일만큼이나 쉽게 느껴졌지.


그가 등을 돌려 팔베개를 해준다. 눈을 감은 채 옹알이를 하는 듯 오물거리는 입술을 보는 순간 키스를 하고 싶어 미칠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춥지?

그의 말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온다.  

-당신과 함께인데 어떻게 추울 수가 있겠어.

 

그는 하트모텔, 504호 더블 침대의 푹신한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렸다.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따뜻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 @ 손구용


-바보처럼 왜 난 당신을 떠났던 걸까?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다.

 

-너의 의지가 아니었잖아. 지금 이렇게 우리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난.   


그의 등 뒤에 새겨진 나비가 어째서 인지 파르르 떨린다.  


-추워.  


그의 입에서 냉기 가득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진. 왜 날 두고 떠난 거야?  


감긴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바보처럼 울고 있다니, 당신답지 않아. 나는 손을 뻗어 꽃잎 같은 눈물을 닦아준다.  


-지금도 바로 네가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그가 새우처럼 두 발을 오므린다. 나는 정수리에 끊임없이 입맞춤을 한다. 그럴수록 그는 눈(雪) 한중간에 서 있는 설인처럼 이불을 끌어올린다.  


-당신, 어둠 속에서 눈을 떠본 적 있다고 했지?  

-아니. 진. 이젠 그럴 수 없어. 네가 내게서 떠났던  날부터였을 거야. 네 몸이 한 마리의 나비처럼 훨훨 날아 도로 위에 널브러진 순간부터 나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으니까. 그 이후로 매일매일의 세상이 암흑과도 같았어. 나는 차마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었지.  

-당신, 아파하지 마. 두려움이라 는 것, 눈을 감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눈을 뜨고 똑바로 마주하는 게 나아. 그래야 비로소 알게 될 테니. 당신은 여전히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가 이 어둠 속에서 눈을 뜨게 되면, 나는 그와 처음으로 따뜻한 체온을 나눴던 하트모텔 504호를 떠나야 할 것이다. 그의 눈꺼풀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눈을 뜨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눈을 떠야 할 시간이다. 나와 함께했던 달콤한 시간은 이미 과거의 것이니까. 그는 삶을 살며, 다시 사랑해야 한다.  


그가 비로소 눈을 떴다. 그의 팔 안에 안겨있던 나의 몸이 천천히 부서져 내린다. 아침 햇살처럼 환하게. 맑은 두 눈을 보게 될 이 순간을 얼마나 기대했던가. 나는 너무나 행복해서 내 몸이 찢기는 철저한 고통 속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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