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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Oct 24. 2015

안경

류예지

눈을 뜨자 흐릿한 천장이 보인다. 어둑어둑해진 사위. 수채화처럼 엷게 퍼진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재게 눈을 비빈다. 머리맡에 올려 두었던 안경이 보이지 않는다. 꺼진 컴퓨터 모니터, 볼일을 덜 마친 듯 반쯤 열린 방문, 닫힌 창 밖 베란다의 옷걸이에 걸려 정직하게 바람을 맞고 있는 그의 청바지.


평온 그리고 적요로움. 본능적으로 이마에 손을 가져간다. 차갑다. 잊고 있었다. 잠들기 전, 감기를 방치했다는 이유로 그의 아빠 같은 잔소리를 들은 뒤 해열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 그는 어떻게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 온 것일까? 이마는 불처럼 뜨거웠다. 사실 나는 아프고 싶었다. 시월의 마지막을 하루 앞둔 스산한 가을 밤, 행여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까 베란다로 향하는 두터운 유리문을 잠근 그가 욕실을 드나들며 뜨거운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얹었다. 


침대는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 나를 끌어안았고, 흡수되듯 그 안락에 몸을 맡겼다. 의식은 물먹은 솜처럼 심연을 향해 깊숙이 가라앉았다. 아득히 잠에 빠져들기 직전까지 분주히 내 주변을 정리하는 소리에 귀 기울였던 듯하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려 할수록 눈이 따갑고 아렸다. 일이 그렇게 되고 나서 나는 온갖 것들에 다, 그렇게 눈이 아렸다. 가을이 저물어 가는 휴일의 아파트는 고요한 기운을 품고 있다. 허나, 가만히 귀 기울이면 겨울을 향해 가는 늦은 가을의 속살거림을 들을 수 있다. 바람과 하늘과 기억, 투명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이야기들이 그 속살거림에 배어 있다.   


몸을 일으킨다. 하루를 고스란히 침대 위에서 보낸 탓에 현기증이 인다. 모든 게 이전의 날들과 다름없다. 하지만  똑같아,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서는 안 될 것만 같다. 어째서 일까. 꺼진 컴퓨터 모니터, 볼일을 덜 마친 듯 반쯤 열린 방문, 닫힌 창밖으로 보이는 베란다의 옷걸이에 걸려 있는 그의 청바지… 모든 게 어제의 풍경과 다름없는데…. 


이 풍경을 평온이라 말할 수 있을까? 달리는 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무시로 멀어지는, 돌아올 수 없는 풍경을 지나 온 것 같다. 내 이마의 열을 수시로 체크해 주던 그를 찾기 위해 동그랗게 입을 연다. 열이 가신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그의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어긋난 퍼즐을 끼워 맞추듯, 그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려고 하지만 졸업앨범 속 잊힌  동창생처럼 그는 희미하게 웃고만 있을 뿐이다. 기억마저 이렇게 흐릿해진 건, 안경을 쓰지 않은 탓일까.


자책하듯 머리칼을 헝클어트린다. 침대 옆 기우뚱 서 있는 전신 거울 속 내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져 있다. 그 날의 쓸쓸했던 그의 표정과 닮았다는 것을 먼 훗날, 이 순간을 떠올리게 될 때야 깨닫게 될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어젯밤 나의 집을 방문했던 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혹, 남아 있을지 모를 그의 흔적을 찾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안경을 찾는다. 안경은 왼쪽 다리가 휜 채 발아래 무심히 떨어져 있다. 



사진 @ 손구용



흐릿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안경을 낀다. 밤새 그를 대신해 나를 보듬어 주었던 두터운 누빔 이불이 선명한 분홍빛깔을 띄며 두 눈을 아프게 찌른다. 눈물.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낯설어 닦을 생각도 않은 채 가만히 벽에 기대선다. 


그래, 이제야 모든 게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꺼진 컴퓨터 모니터, 볼일을 덜 마친 듯 반쯤 열린 방문, 닫힌 창 밖 베란다의 옷걸이에 걸려 있는 주인을 잃은 그의 청바지… 주머니에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끼어 있던 선명한 노란 빛깔의 은행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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