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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Nov 20. 2018

나는 사랑하기로 했다

류예지

솔직히 말하면, 서울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만 해도 이번 여행을 취소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기 기운이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 비루먹을 체력으로는 왕복 여덟 시간  여정을 고스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은 그의 얼굴이 소풍 당일 날 아이처럼 들떠 있어 차마 입이 떼 지지 않았다.  


이틀 연속 지방 출장을 다녀오고도 기어이 시간을 내 집 앞까지 찾아온 그의 성의를 거절하긴 더욱 어려웠다. 코트 주머니 속 감기약을 만지작거리며 시린 듯 창밖을 내다보았다. 계절은 과연 가을이었다. 가까이로는 은행나무가, 멀리로는 단풍이 한창이어서 지천이 울긋불긋 누렁누렁 했다. 


우리는 경기도 인근쯤 차를 세워 주유소에 딸린 마트 앞에서 휴식을 취했다. 간단히 요기를 한 후, 서해안도로와 중부고속도로를 번갈아 갈아타며 네 시간을 꼬박 달렸다. 체력이 한계에 닿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굽이굽이 남한강으로 둘러싸인 한 지방도시의 초입에 간신히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나를 데려갔다.  


공용주차장은 단체 손님을 실은 관광차와 가족 단위로 놀러 온 가족들의 승합차로 이미 만석이었다. 우리는 관광지 입구의 도로가에 차를 세워둔 채, 또 하나의 입구 역할을 하고 있는 터널을 따라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터널을 막 벗어났을 때, 남한강을 허리에 휘감은 가을 산의 풍경이 훤히 드러났다. 예측하지 못한 절경 앞에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류예지



그의 손을 잡고 강변을 에둘러 걷기 시작했다. 그는 십 년 전 가족여행으로 이곳에 온 적이 있음을 고백했다. 그때가 잘 잊히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어쩐지 아련해 보였다. 강 중앙에 우뚝 솟은 세 개의 바위를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근처 펜션에서 하룻밤을 묵었어요. 형이 삼겹살을 굽고, 형수가 김치찌개를 끓였죠. 엄마의 표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행복해하셨던 것 같아요. 그때는 조카가 태어나기 전이라, 우리는 반주를 하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수면에 비치는 산의 비경. 나는 챙겨 온 숄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지만 이가 덜덜 떨릴 만큼 오한을 느끼고 있었다. 문득, 이 증상은 감기가 분명할 텐데, 수직 하강하듯 컨디션이 바닥까지 곤두박질치다가도 카메라 앞에 선 관광객의 달뜬 표정처럼 수직 상승하는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쩐지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애먼 입술만 달싹거렸다. 우리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으로 쏘가리 매운탕을 먹었다. 그는 민물고기 특유의 비린 맛이 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매운탕은 맛있었다. 뜨거운 국물을 연신 삼켰다. 그는 밥을 먹는 내내 쏘가리의 살을 발라 내 공깃밥 위에 한 점씩 올려주었다. 그는 감기에 걸린 몸으로 이곳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전혀 개의치 말라했지만, 그 미안함과 서투름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매운탕의 국물을 후후 불어 먹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저녁이 되면서 부쩍 차가워진 산 중의 날씨, 식당을 나오자마자 차에 올랐다. 더욱 가라앉은 컨디션을 어떻게든 끌어올리기 위해 감기약을 쓰게 삼켰다. 




도시를 막 벗어났을 때부터 나는 밀려드는 졸음으로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그에게 양해를 구해 좌석을 뒤로 젖혔다. 그러고는 이기적이게도 까무룩 단잠에 빠졌다. 얼결에 눈을 떴을 때, 시린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그의 옆모습이 들어왔다. 단단해 보이는 인상, 어떤 이유로든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눈빛. 나는 잠이 깼다는 사실을 금방 알리지 않았다. 길 반대에서 달려오는 차의 전조등이 그의 얼굴에 밝음과 어둠을 번갈아가며 드리웠던 탓이었다. 밝음은 익숙했지만, 어둠은 여전히 낯설었다. 만나는 내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문득,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두려워졌다. 


하루를 꼬박 함께하면서도, 옆에 꼼짝 않고 붙어 절경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하지 못했던, 그 말이 무엇인지를 가만가만 헤아려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숨을 죽인 채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나는 멀지 않은 시점에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의 긴 이야기의 짧은 서두에 불과한 그 말을.   



나는 사랑하기로 했다.
그를.
그 밤엔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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