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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Jul 20. 2017

1978, 해가 지지 않는 시코쿠 섬

류예지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어머니는 급속히 고독에 물들어갔다. 마치 비틀스의 음악에 심취했던 열여덟 살의 나처럼.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부재와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 무심했던 태도에 대한 원망이 앙금처럼 남아 있던 탓일까. 그러나 엄마는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 역시 감정을 표현하는데 조금 서툴렀을 뿐이다.  


유년을 보낸 오사카의 도부시조마에  뒤뜰에는 조그마한 우물이 하나 있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물은 무거운 합판에 반쯤 가려져 밑바닥의 모습을 정교히 숨기고 있었다. 형제 없이 자랐고 딱히 친구가 없었던 나는 수업이 끝나면 현관에 가방을 던져놓고 뒤뜰로 가 가만히 우물을 들여다보는 낙으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물 속으로 회오리쳐 들어가는 빛의 잔상을 쫓다가 생일 선물로 받은 코끼리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빠뜨리게 되었다. 어머니는 외출 중이었고 목걸이를 삼켜버린 이후로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린 우물 옆에서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서성대고만 있었다.


어스름이 깔렸지만 외출한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퇴근한 아버지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기 전까지 나는 지독한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그러니까 그에게로 달려가 겹겹이 쌓아 두었던 울음을 터뜨린 것은, 가장 아끼는 목걸이를 빠뜨렸다는 아쉬움과 더불어, 빈집에 방치된 채 느꼈던 끔찍했던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이 진정으로 고마워서였다. 


 -무슨 일 있니? 세이코?
 -우물… 에다… 목걸이를… 빠뜨렸어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화단 옆에 세워 둔 긴 장대를 들고 와 우물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심연 속으로 사라져 버린 목걸이를 건져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땀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이코. 어쩔 수 없구나. 아빠가 내일 퇴근길에  난바에  들러서 세상에서 가장  덩치가 큰 코끼리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사줄게. 세상 어느 곳에 빠뜨린다 해도 너를 찾아갈 수 있는 영리한 녀석으로 말이야.


그리고는 의기소침해진 나를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그의 와이셔츠는 흠뻑 젖어 있었다. 그때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은 포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것이 아버지의 표현 방식이었던 셈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몸을 추스른 엄마는 소꿉친구 두 분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어디로 가게 될 건지 확실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집을 나서며,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이 잠자고 있는 곳으로 가게 될 거야.


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녀의 말이 가리키고 있는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행에서 돌아오면 그녀는 지금보다는 더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열여덟 살에 떠났던 깊은 우물이 있는 옛집에 남겨졌다. 우물은 이미 오래전에  흔적도 없이 매워졌다.  집안 곳곳을 청소하던 나는 옷장으로 쓰고 있던 쪽방에 들어가게 됐고 그 방과 연결된  다락으로 올라가게 됐다. 누르틱틱한 표지의 빨강 머리 앤 셜리를 처음 만난 내 유년의 공간을 발견한 순간, 나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회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는 진기한 옛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자잘한 소품들을 버리지 못하는 엄마의 성미가 반영된 유일한 공간이었다.


금발 빛이 바랜 바비 인형과 별 모양 모빌 사이에서 두꺼운 사진첩을 발견했다. 하나는 아기 때부터 열다섯 살 무렵까지의 내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사진첩이었고, 또 하나는 지금보다 더 젊은 시절의 부모님이 담겨 있는 사진첩이었다. 생경한 기분이었다. 지금의 모습이 언뜻언뜻 남아 있는 것도 같지만 그들의 모습은 어쩐지 낯설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한 장 한 장 옛 기억을 더듬어 가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묘했다. 사진 귀퉁이에 ‘스물둘, 대학 졸업 기념 여행’이라는 문구가 적힌 사진을 발견했을 때, ‘그녀에게도 이런 나이가 있었나’ 하는 의구심과 함께 경외심이 동시에 들었다.


시코쿠 섬으로 졸업 기념 여행을 갔다는 이야기는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를 통해서였는지 엄마를 통해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녀의 등 뒤로  붉은색 물감을 엷게 풀어놓은 듯 노을이 황홀하게 타오르고 있다. 그의 양 옆으로 유키 아줌마와  히카리 아줌마가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는 허공으로 삿대질을 하고 있다. 유키 아줌마의 뚱한 표정이 재미있어 풋, 하고 웃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들의 배경이 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왠 낯익은 남자의 얼굴이 있었던 것이다. 곧게 뻗은 콧날, 고집스럽게 다문 입매,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유난히 큰 키, 그는 틀림없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도 일행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 했던가 보다. 그러다 무슨 신호라도 받은 사람처럼 셔터를 눌렀을 시점에 어머니의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아버지의 일행들은 전부 사진 왼편의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데 유독 아버지의 몽롱한 시선만이 어머니를 향해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내 가슴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길게 이어지고 나서야 오랜만에 생기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온천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엄마, 옛날에 시코쿠 섬으로 여행 간 적 있어요?"

"그건 왜 세이코?"

"궁금해서"



@anego



"스물두 살 무렵이었을 거야, 아마 77년도였나. 아니다, 78년도.
그 해 겨울에 네 아버지를 만났으니까 말이야.
물론, 친구들이랑 간 적이 있지.
이 얘긴 내가 해준 적이 없었던 것 같구나.
근데 세이코….
지금 엄마가 그때 그 친구들과 함께 
시코쿠 섬으로 여행을 간다고 말했었니?"


그녀의 말이 조곤조곤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사진 뒷면에서 지금은 흐려진 볼펜 자욱이 만들어낸 '1978년, 해가 지지 않는 시코쿠 섬’이라는 문구를 보게 됐다. 묵묵히  배경이 되어주고 있던 젊은  아버지의 모습을, 그것도 모르고 벚꽃처럼 흐드러지게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차례대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살포시 고였다. 이를테면 그것은 운명의 표현 방식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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