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달리며…
어느새 거리엔 젖은 낙엽이 포개져 있고, 나무엔 몇 장 남지 않은 잎이 매달려 있다. 차를 몰고 지나가면, 한때그늘을 드리우던 가로수 사이로 햇빛이 부서져 차창 안으로 들어온다. 가을이 깊었다는 말과, 가을이 지나간다는 말이 동시에 맞는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달리기를 시작하면 공기의 냉기가 먼저 손끝에 닿는다.몇 달 전만 해도 푸르던 풍경은 무대 세트가 교체된 것처럼 달라져 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그렇다. 계절은 늘 조용히, 그러나 완강하게 바뀐다. 나는 그 변화를 맞으며 밤공기를 가르고 달린다.
경주마라톤을 앞두고 다쳤던 발목은 아직 불완전하지만, 천천히 달리는 데 큰 문제는 없다. 다만 뛰고 나면 묵직한 느낌이 남는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으며 계속 달린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런 믿음이 생겼다.
나는 일상보다 달리는 주로 위에서 계절을 더 정확히 느낀다. 바람의 온도, 바람의 무게 같은 것들이 피부를 통해 전해온다. 익숙한 나무도 어느새 색이 바뀌어져 있다.
뛰다 보면 문득 오래된 장면들이 떠오른다.
순서도 없고, 앞뒤도 맞지 않지만, 갑자기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기억들. 몇 살이었는지, 어디서 살고 있었는지, 스스로 그 시절의 좌표를 대략적으로 짚어본다.
어제 신정호수를 뛰다가 연꽃이 가득하던 연못을 지났다. 연꽃은 없고 물만 남아 있었다. 그 물을 보니 어린 시절 얼어붙은 논에서 썰매를 타던 기억이 났다.
‘겨울이 오면 이곳도 꽁꽁 얼겠지. 그 위를 달릴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나갔다.
어린 시절 내 썰매는 늘 형들이 만들어줬다. 나는 그저 탔을 뿐이다. 그래서 썰매를 직접 만들어본 기억이 없다. 막내란 원래 그런 존재다. 어떤 해엔 철사가 날이 되었고, 어떤 해엔 스케이트 날을 떼어 붙이기도 했다.
해마다 썰매는 조금씩 더 빨라졌다. 마치 해마다 신차가 출시되듯 올해의 썰매는 매년 출시되었었다. 언제 단종되었는지 기억은 없다.
달리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 보면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누군가는 호텔에서 호캉스를 즐기고, 어떤 남자들은 차 안(차캉스)이나 화장실(화캉스)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지만,
나에게 그런 시간은 달리기에서 온다. 달캉스라고 이름붙여도 괜찮겠다.
예전엔 조금만 뛰어도 힘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이제는 한두 시간 달리며 생각을 정리하거나 비워낸다. 기록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오래 달릴 수 있게 된 건 분명하다.
달리기는 건강을 지켜주고, 계절을 실시간으로 체험하게 하며, 흩어진 생각들을 다시 한 자리에 모아놓는다.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숨을 곳, 자기만의 동굴이 있다고 한다. 나에게 그 동굴은 달리기다. 달리기는 충전소이고, 유일하게 하락이 없고 후회 없는 투자처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큰 하락 없이 꾸준히 우상향 하는 우량취미로 만들어 가고 싶다.
깊어가고 깊어오는 가을밤,
타닥타닥 발소리를 남기며 나는 오늘도 내 작은 동굴 속을 달린다. 나의 달캉스를 찬미하며…